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982 추천 수 1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떨어지는 법 


  오늘은 낙엽이 모두 떠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몸을 날립니다. 우수수 우수수 나무의 몸을 빠져 나와 땅에 내리는 낙엽을 보며 나는 그저 "아아아!" 하고 소리 칠 뿐입니다. 나뭇잎이 거의 다 빠져나간 은행나무 밑은 황금의 옷감을 바닥에 쫙 깔아 놓은 것 같습니다. 구릿빛과 고동색 점묘로 그려나가는 산의 능선 위에 가을햇살이 찬란하게 내립니다.
  
  자연은 떨어져 내리고 있는 동안에도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떨어져 내리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합니다. 투자한 재화의 가격이 떨어지고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추락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미국의 작가 필립시먼스는 어느 날 여섯 살짜리 딸아이가 보는 앞에서 균형을 잃고 고꾸라진 뒤 일어서지 못하는 채로 누워 있었습니다. 멀쩡하던 육체의 근육이 위축되는 루게릭병에 걸린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니,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는 육신을 지켜보며 필립시먼스는 낙법에 대해 생각합니다. 떨어지는 것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떨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내버리는가? 우리는 에고를 내버리고, 애써 쌓아올린 정체성과 평판과 소중한 자아를 내버린다. 야망을 내버리고, 탐욕을 내버리고,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이성을 내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떨어지는가? 열정 속으로, 공포 속으로, 터무니없는 기쁨 속으로 떨어진다. (......) 그리고 마침내 성스러운 존재와 직면하게 된다. 신성, 신비, 더 훌륭하고 더 거룩한 우리 자신의 본성과 마주하게 된다."
  
  떨어지지 않으면 성스러운 존재와 직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동안 에고와 탐욕을 버릴 수 있으면 더 거룩한 우리 자신의 본성과도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떨어진다는 말(falling)이 지니고 있는 비유적 의미 속에는 추락만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체면을 구기는 일(falling on one's face), 누군가에게 홀딱 반하는 일(falling for someone), 사랑에 빠지는 일(fall in love)도 다 fall로 표현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문합니다.
  
  "우리는 모두 떨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모두 높은 곳에서 떨어져 깊은 곳을 향해 한창 하강하고 있는 중이다. (......) 우리가 신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하고 있다면, 은총과 '함께' 은총을 '향해서'도 추락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우리가 고통과 나약함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즐거움과 강력함을 향해서도 떨어지자. 우리가 죽음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삶을 향해서도 떨어지자."
  
  낙엽은 가을햇빛 하나씩 달고 찬란하게 떨어져 내리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향해 떨어지고 있습니까?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3209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2585
2235 이해 바람의종 2008.11.22 6927
2234 포옹 風文 2015.01.18 6926
2233 '마음의 기술' 하나만으로... 바람의종 2012.09.25 6925
2232 '순수의식' 風文 2014.12.18 6925
2231 5분 글쓰기 훈련 風文 2015.01.20 6922
2230 신념의 마력 바람의종 2012.08.14 6920
2229 카지노자본주의 - 도종환 (98) 바람의종 2008.11.26 6917
2228 사랑할수록 윤안젤로 2013.03.05 6917
2227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습니까 - 도종환 (136) 바람의종 2009.03.01 6912
2226 영웅의 탄생 風文 2015.02.23 6908
2225 빛은 있다 바람의종 2012.08.14 6907
2224 이로움과 의로움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07 6902
2223 그대와의 인연 바람의종 2008.09.29 6900
2222 지금 하는 일 風文 2015.06.29 6899
2221 책이 제일이다 바람의종 2009.03.16 6898
2220 안무가 風文 2014.12.17 6898
2219 회복 탄력성 風文 2017.01.02 6895
2218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바람의 소리 2007.09.04 6894
2217 '스님은 고민 없지요?' 바람의종 2012.10.05 6891
2216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 風文 2015.02.23 6891
2215 기적을 믿으며... 風文 2015.01.14 6889
2214 매력 있는 지도력 風文 2014.11.29 6882
2213 라일락 향기 바람의종 2009.03.03 6877
2212 학생과 교사, 스승과 제자 風文 2015.02.14 6877
2211 정원으로 간다 바람의종 2012.09.04 687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