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063 추천 수 1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떨어지는 법 


  오늘은 낙엽이 모두 떠나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몸을 날립니다. 우수수 우수수 나무의 몸을 빠져 나와 땅에 내리는 낙엽을 보며 나는 그저 "아아아!" 하고 소리 칠 뿐입니다. 나뭇잎이 거의 다 빠져나간 은행나무 밑은 황금의 옷감을 바닥에 쫙 깔아 놓은 것 같습니다. 구릿빛과 고동색 점묘로 그려나가는 산의 능선 위에 가을햇살이 찬란하게 내립니다.
  
  자연은 떨어져 내리고 있는 동안에도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떨어져 내리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합니다. 투자한 재화의 가격이 떨어지고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추락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미국의 작가 필립시먼스는 어느 날 여섯 살짜리 딸아이가 보는 앞에서 균형을 잃고 고꾸라진 뒤 일어서지 못하는 채로 누워 있었습니다. 멀쩡하던 육체의 근육이 위축되는 루게릭병에 걸린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니,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는 육신을 지켜보며 필립시먼스는 낙법에 대해 생각합니다. 떨어지는 것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떨어질 때 우리는 무엇을 내버리는가? 우리는 에고를 내버리고, 애써 쌓아올린 정체성과 평판과 소중한 자아를 내버린다. 야망을 내버리고, 탐욕을 내버리고,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이성을 내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떨어지는가? 열정 속으로, 공포 속으로, 터무니없는 기쁨 속으로 떨어진다. (......) 그리고 마침내 성스러운 존재와 직면하게 된다. 신성, 신비, 더 훌륭하고 더 거룩한 우리 자신의 본성과 마주하게 된다."
  
  떨어지지 않으면 성스러운 존재와 직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동안 에고와 탐욕을 버릴 수 있으면 더 거룩한 우리 자신의 본성과도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떨어진다는 말(falling)이 지니고 있는 비유적 의미 속에는 추락만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체면을 구기는 일(falling on one's face), 누군가에게 홀딱 반하는 일(falling for someone), 사랑에 빠지는 일(fall in love)도 다 fall로 표현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문합니다.
  
  "우리는 모두 떨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모두 높은 곳에서 떨어져 깊은 곳을 향해 한창 하강하고 있는 중이다. (......) 우리가 신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하고 있다면, 은총과 '함께' 은총을 '향해서'도 추락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우리가 고통과 나약함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즐거움과 강력함을 향해서도 떨어지자. 우리가 죽음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삶을 향해서도 떨어지자."
  
  낙엽은 가을햇빛 하나씩 달고 찬란하게 떨어져 내리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향해 떨어지고 있습니까?










   
 
  도종환/시인

  1. No Image notice by 風文 2023/02/04 by 風文
    Views 16208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2. 친구야 너는 아니

  3. No Image 13Nov
    by 바람의종
    2008/11/13 by 바람의종
    Views 7497 

    사자새끼는 어미 물어죽일 수 있는 용기 있어야

  4. No Image 13Nov
    by 바람의종
    2008/11/13 by 바람의종
    Views 5672 

    아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5. No Image 12Nov
    by 바람의종
    2008/11/12 by 바람의종
    Views 7331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 도종환 (93)

  6. No Image 12Nov
    by 바람의종
    2008/11/12 by 바람의종
    Views 12226 

    "그래, 좋다! 밀고 나가자"

  7.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5374 

    불은 나무에서 생겨 나무를 불사른다 - 도종환 (92)

  8.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7903 

    친구인가, 아닌가

  9.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5312 

    뚜껑을 열자!

  10.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5479 

    나는 용기를 선택하겠다

  11.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5010 

    놀이

  12.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4878 

    도롱뇽의 친구들께

  13.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7206 

    아주 낮은 곳에서

  14.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6729 

    세상은 아름다운 곳 - 도종환 (91)

  15.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7063 

    떨어지는 법 - 도종환 (90)

  16.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7302 

    안네 프랑크의 일기 - 도종환 (89)

  17.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6740 

    그대의 삶은...

  18.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7855 

    "10미터를 더 뛰었다"

  19. No Image 03Nov
    by 바람의종
    2008/11/03 by 바람의종
    Views 7892 

    청소

  20. No Image 01Nov
    by 바람의종
    2008/11/01 by 바람의종
    Views 6244 

    세상사

  21. No Image 31Oct
    by 바람의종
    2008/10/31 by 바람의종
    Views 6126 

    아홉 가지 덕 - 도종환 (88)

  22. No Image 31Oct
    by 바람의종
    2008/10/31 by 바람의종
    Views 7709 

    백만장자로 태어나 거지로 죽다

  23. No Image 30Oct
    by 바람의종
    2008/10/30 by 바람의종
    Views 10593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87)

  24. No Image 30Oct
    by 바람의종
    2008/10/30 by 바람의종
    Views 6280 

    사랑도 뻔한 게 좋다

  25. No Image 30Oct
    by 바람의종
    2008/10/30 by 바람의종
    Views 8714 

    김성희의 페이지 - 가을가뭄

  26. No Image 29Oct
    by 바람의종
    2008/10/29 by 바람의종
    Views 6770 

    은행나무 길 - 도종환 (86)

  27. No Image 29Oct
    by 바람의종
    2008/10/29 by 바람의종
    Views 6336 

    내 몸은 지금 문제가 좀 있다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