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789 추천 수 1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가을 오후 상당산 고갯길을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단풍이 참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원을 거쳐 보은으로 가는 길을 지나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황홀하였습니다. 나는 길가에 줄 지어 선 은행나무 사이를 지나오며 나무들에게 거수경례 하였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은행나무는 순간순간 제 삶에 충실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목마른 날들도 많았고, 하염없이 빗줄기에 젖어야 하는 날도 있었으며, 뜨거운 햇살에 몸이 바짝바짝 타는 날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햇살에도 정직하였고 목마름에도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시달릴 때는 시달리는 대로 바람을 받아들였고, 구름 그림자에 그늘진 날은 그늘 속에서 담담하였습니다.
  
  제게 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노란 황금빛 잎들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은행나무 밑에 서서 은행나무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황홀의 편린들을 하나씩 떼어 바람에 주며 은행나무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 빛나는 순간이 한 해의 절정임을 은행나무도 알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순간을 오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일도 보고 다음 주에도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한 해에 한 번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 아래서 남아 있는 우리 생의 어느 날이 이렇게 찬란한 소멸이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 충실하고 정직하였던 삶이 황홀하게 단풍지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7101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6582
810 위기관리 능력 10 윤안젤로 2013.04.19 13617
809 위기일 때 더욱 정직하라 風文 2020.06.13 877
808 위대하고 보편적인 지성 風文 2024.05.08 373
807 위대한 당신의 위대한 판단 바람의종 2012.12.21 9049
806 위대한 마음의 발견 風文 2024.05.31 122
805 위대한 시작 윤영환 2013.06.28 12238
804 위대한 인생 승리자 風文 2023.11.14 843
803 위대한 인연 윤안젤로 2013.03.05 6450
802 위대한 필란트로피스트 風文 2020.07.08 1451
801 위험하니 충전하라! 風文 2014.08.12 10091
800 유머로 나를 바라보기 바람의종 2011.07.26 4681
799 유목민의 '뛰어난 곡예' 風文 2023.06.17 1053
798 유유상종(類類相從) 風文 2015.06.07 8067
797 유쾌한 시 몇 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8614
796 유쾌한 활동 風文 2014.12.20 8007
795 육의 시간, 영의 시간 風文 2020.07.01 957
794 육체적인 회복 風文 2021.09.02 736
793 육체적인 회복 風文 2023.08.03 975
792 융자를 요청하라 - 레스 휴윗, 액티버 캐나다 세미나의 창설자 風文 2022.10.27 1093
791 은하계 통신 風文 2018.01.02 4189
» 은행나무 길 - 도종환 (86) 바람의종 2008.10.29 6789
789 은혜를 갚는다는 것 風文 2019.06.19 1089
788 음식의 '맛'이 먼저다 風文 2023.06.21 1111
787 음악으로 치유가 될까 風文 2022.01.12 1103
786 음악이 중풍 치료에도 좋은 이유 風文 2022.01.15 85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