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770 추천 수 1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가을 오후 상당산 고갯길을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단풍이 참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원을 거쳐 보은으로 가는 길을 지나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황홀하였습니다. 나는 길가에 줄 지어 선 은행나무 사이를 지나오며 나무들에게 거수경례 하였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은행나무는 순간순간 제 삶에 충실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목마른 날들도 많았고, 하염없이 빗줄기에 젖어야 하는 날도 있었으며, 뜨거운 햇살에 몸이 바짝바짝 타는 날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햇살에도 정직하였고 목마름에도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시달릴 때는 시달리는 대로 바람을 받아들였고, 구름 그림자에 그늘진 날은 그늘 속에서 담담하였습니다.
  
  제게 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노란 황금빛 잎들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 은행나무 밑에 서서 은행나무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황홀의 편린들을 하나씩 떼어 바람에 주며 은행나무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 빛나는 순간이 한 해의 절정임을 은행나무도 알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순간을 오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일도 보고 다음 주에도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한 해에 한 번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 아래서 남아 있는 우리 생의 어느 날이 이렇게 찬란한 소멸이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 충실하고 정직하였던 삶이 황홀하게 단풍지는 시간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6105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5529
2785 2. 세이렌 風文 2023.06.16 931
2784 23전 23승 바람의종 2011.11.28 4765
2783 24시간 스트레스 風文 2023.08.05 858
2782 27센트가 일으킨 기적 風文 2020.07.12 2063
2781 28살 윤동주와 송몽규의 한 맺힌 순국 風文 2022.05.25 1259
2780 2도 변화 바람의종 2009.03.24 7428
2779 3,4 킬로미터 활주로 바람의종 2012.11.21 7659
2778 35살에야 깨달은 것 風文 2023.10.10 944
2777 37조 개의 인간 세포 風文 2022.02.01 1078
2776 38번 오른 히말라야 바람의종 2010.07.03 3643
2775 3~4년이 젊어진다 風文 2022.12.20 723
2774 3년은 기본 바람의종 2010.05.13 3335
2773 3분만 더 버티세요! 風文 2015.02.17 6965
2772 4.19를 노래한 시 - 도종환 (106) 바람의종 2008.12.12 7335
2771 49. 사랑 2 風文 2021.09.14 806
2770 4월 이야기 바람의종 2008.04.10 10080
2769 50. 자비 風文 2021.09.15 804
2768 51. 용기 風文 2021.10.09 1016
2767 52. 회개 風文 2021.10.10 829
2766 53. 집중 風文 2021.10.13 744
2765 54. 성 風文 2021.10.14 1088
2764 55. 헌신 風文 2021.10.15 732
2763 56. 지성 風文 2021.10.28 720
2762 57. 일, 숭배 風文 2021.10.30 664
2761 58. 오라, 오라, 언제든 오라 風文 2021.10.31 71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