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119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늘 다니던 길이 갑자기 고적해 보이는 날이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다니던 길인데 그 길이 넓어 보이고 허전해 보입니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 길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수많은 바퀴 자국이 오고갔는데, 잠시 보낼 것은 다 보내고 홀로 누워 있는 길을 만나면 그 길이 그렇게 고적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위에 늦은 가을 햇살이 내려와 있으면 오래오래 나도 거기 앉아 있고 싶습니다. 괜찮다면 한참을 누워 있었으면 싶습니다.
  
  저녁 강물을 보면서 오래 전부터 느꼈던 고적함입니다.
  
  끝없이 끝없이 제게 오는 것들을 흘려보내기만 하는 저녁 강물을 보며 강물이 고적해 보이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저 제 것으로 붙잡아 두고 있으려고만 하지 않고 아낌없이 흘려보냄으로써 생명이 유지되는 강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관용 그 자체입니다.
  
  끊임없이 넓은 곳으로 나아가도록 등을 밀어 주는 동안 비로소 강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기 때문에 늘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노을 등에 진 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저녁 강물의 뒷모습은 돌아와 누워도 가슴 깊은 곳으로 고적하게 흘러가곤 합니다.
  
  그런 밤 별빛은 또 왜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지요.
  
  하늘 그 먼 곳에서 지상의 아주 작은 유리창에까지 있는 것을 다 내주었는데도 가까이 오는 것은 바람뿐인 저녁. 별들이 차가운 바람으로 몸을 씻고 하얗게 반짝이는 모습은 가을이 깊어 갈수록 우리 마음을 고요히 흔들곤 합니다. 차가운 아름다움. 쓸쓸해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가을별에서 봅니다.
  
  그런 별 아래서 더욱 외로운 날이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도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말할 수 없이 외로운 날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오면서, 사람들과 섞이어 흔들리는 저녁차에 매달려 돌아오면서 깊이깊이 외로운 날이 있습니다.
  내 안의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외로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외로움. 한지에 물이 배어 스미듯 몸 전체로 번져 가는 이 저녁의 고적함.
  
  저녁 무렵의 고적함 속에 끝없이 가라앉는 날이 있습니다.










   
 
  도종환/시인

  1.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Date2023.02.04 By風文 Views13040
    read more
  2. 친구야 너는 아니

    Date2015.08.20 By風文 Views102397
    read more
  3. 사자새끼는 어미 물어죽일 수 있는 용기 있어야

    Date2008.11.13 By바람의종 Views7439
    Read More
  4. 아는 것부터, 쉬운 것부터

    Date2008.11.13 By바람의종 Views5614
    Read More
  5.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 도종환 (93)

    Date2008.11.12 By바람의종 Views7274
    Read More
  6. "그래, 좋다! 밀고 나가자"

    Date2008.11.12 By바람의종 Views12075
    Read More
  7. 불은 나무에서 생겨 나무를 불사른다 - 도종환 (92)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5319
    Read More
  8. 친구인가, 아닌가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7762
    Read More
  9. 뚜껑을 열자!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5245
    Read More
  10. 나는 용기를 선택하겠다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5428
    Read More
  11. 놀이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4974
    Read More
  12. 도롱뇽의 친구들께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4796
    Read More
  13. 아주 낮은 곳에서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7153
    Read More
  14. 세상은 아름다운 곳 - 도종환 (91)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6636
    Read More
  15. 떨어지는 법 - 도종환 (90)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6969
    Read More
  16. 안네 프랑크의 일기 - 도종환 (89)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7252
    Read More
  17. 그대의 삶은...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6643
    Read More
  18. "10미터를 더 뛰었다"

    Date2008.11.11 By바람의종 Views7715
    Read More
  19. 청소

    Date2008.11.03 By바람의종 Views7731
    Read More
  20. 세상사

    Date2008.11.01 By바람의종 Views6151
    Read More
  21. 아홉 가지 덕 - 도종환 (88)

    Date2008.10.31 By바람의종 Views6068
    Read More
  22. 백만장자로 태어나 거지로 죽다

    Date2008.10.31 By바람의종 Views7567
    Read More
  23.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87)

    Date2008.10.30 By바람의종 Views10507
    Read More
  24. 사랑도 뻔한 게 좋다

    Date2008.10.30 By바람의종 Views6125
    Read More
  25. 김성희의 페이지 - 가을가뭄

    Date2008.10.30 By바람의종 Views8600
    Read More
  26. 은행나무 길 - 도종환 (86)

    Date2008.10.29 By바람의종 Views6660
    Read More
  27. 내 몸은 지금 문제가 좀 있다

    Date2008.10.29 By바람의종 Views6268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