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10.07 13:26

여백 - 도종환 (77)

조회 수 11629 추천 수 1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언덕 위에 있는 나무들, 산 위에 있는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그 뒤로 광활한 하늘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을 봅니다. 솟대가 빽빽한 건물에 가려 있으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솟대의 뒤에는 빈 하늘이 배경이 되어 있어야 솟대다워 보입니다. 그래야 솟대의 아름다운 멋이 살아납니다.
  
  화폭을 유화물감으로 빈틈없이 채우기보다 여백으로 그냥 남겨두는 한국화가 저는 좋습니다. 조각품도 작품 주위에 빈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작품의 맛이 제대로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네거티브 스페이스라고 합니다.
  
  사람도 살아가는 동안 여기저기 여백을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하루의 일정 중에 단 한 시간도 여백이 있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루 생활 중에도 여백의 시간이 있어야 하고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정신적인 여백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어디 한 군데쯤 비어 있는 것도 좋습니다. 완벽해 보이기보다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더 인간답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것도 정신적인 여백, 정신적인 여유를 더 많이 갖고자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백을 여러분의 배경으로 삼아보세요. 그리로 바람 한 줄기 지나가게 해 보세요.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2986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2338
3034 153세 냉동인간이 부활했다? - 냉동인간에 대하여 바람의종 2007.09.19 46823
3033 ‘옵아트’ 앞에서 인간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된다! 바람의종 2007.08.15 46278
3032 '푸른 기적' 風文 2014.08.29 39067
3031 사랑이 잔혹한 이유는 에로스 신 부모 탓? 바람의종 2008.03.27 26446
3030 쥐인간의 죄책감은 유아기적 무의식부터? - 강박증에 대하여 바람의종 2007.10.10 25292
3029 행복과 불행은 쌍둥이 형제라고? 바람의종 2007.08.09 22415
3028 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125) 바람의종 2009.02.02 21513
3027 희망이란 風文 2013.08.20 19343
3026 현대예술의 엔트로피 바람의종 2008.04.09 18800
3025 '야하고 뻔뻔하게' 風文 2013.08.20 18749
3024 정말 당신의 짐이 크고 무겁습니까? 바람의종 2007.10.10 18691
3023 136명에서 142명쯤 - 김중혁 윤영환 2006.09.02 18408
3022 그가 부러웠다 風文 2013.08.28 18098
3021 Love is... 風磬 2006.02.05 18092
3020 다다이즘과 러시아 구성주의에 대하여 바람의종 2010.08.30 17824
3019 커피 한 잔의 행복 風文 2013.08.20 17542
3018 히틀러는 라디오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바람의종 2008.08.05 16893
3017 자연을 통해... 風文 2013.08.20 16638
3016 젊은이들에게 - 괴테 바람의종 2008.02.01 16387
3015 흉터 風文 2013.08.28 16385
3014 방 안에 서있는 물고기 한 마리- 마그리트 ‘낯설게 하기’ 바람의종 2007.02.08 15413
3013 신문배달 10계명 風文 2013.08.19 15359
3012 길 떠날 준비 風文 2013.08.20 15355
3011 세계 최초의 아나키스트 정당을 세운 한국의 아나키스트 바람의종 2008.07.24 1532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