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9.01 12:07

빛깔 - 도종환 (64)

조회 수 6753 추천 수 1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기차를 타고 산 옆을 지나가면서 산 아래를 끼고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면 눈에 띄는 게 있습니다. 큰 강물이든 작은 여울이든 푸른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 근처의 물빛은 나뭇잎을 닮아서인지 나뭇잎 빛깔입니다. 늘 하늘을 누워 보면서 흐르는 바닷물은 아마 하늘을 닮아 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때도 있습니다. 하늘처럼 넓은 고통, 하늘처럼 깊고 적막한 슬픔을 가까이 보면서 깊어졌기 때문에 하늘을 닮아 하늘과 같은 빛깔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살굿빛 저녁노을을 안고 흐르는 저녁 강물도 노을빛을 닮아 흐르게 마련인 것처럼 사람도 자연도 저마다의 빛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살면서 느끼는 거지만 봄에는 봄의 빛깔이 있고 여름에는 여름의 빛깔이 있습니다. 겨울 지등산은 지등산의 빛깔을 지닌 채 육중하게 앉아 있고 가을 달래강은 달래강의 빛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얼굴과 표정과 목소리 속에 모두 저마다 제 빛깔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살아온 삶, 그의 인생관, 그의 성격이 얼굴 모습과 목소리 속에 고여 있음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잿빛 승복을 입고 고개를 넘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에 어리는 구름의 빛깔은 세속의 욕망을 담담하게 접어 두고 깊어 가는 한 인간의 영혼의 색조를 느끼게 합니다.
  
  차분한 목소리, 담백한 표정의 사람과 마주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그를 따라 작설차 향내가 감도는 경험을 갖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무슨 빛깔 무슨 향내로 살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의 물빛처럼 검게 일그러져 있는 때가 더 많지는 않은지요? 많은 날 많은 시간 우리는 자꾸 자신의 본래 모습, 본래의 빛깔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려고 괴로워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티 없는 새 소리 맑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란 나뭇잎의 빛깔이 진짜 푸른빛을 지니고 있듯이, 어려서부터 나뭇잎의 진녹색 빛깔 속에서 때 묻지 않은 바람 소리를 들으며 목소리를 키워 온 새 소리가 진짜 맑은 소리를 내듯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빛깔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목소리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5031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4431
235 아버지가 수없이 가르친 말 風文 2023.03.29 1039
234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風文 2023.03.29 955
233 하나만 아는 사람 風文 2023.04.03 882
232 '멋진 할머니'가 되는 꿈 風文 2023.04.03 828
231 씨앗 뿌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風文 2023.04.03 881
230 곡지(曲枝)가 있어야 심지(心志)도 굳어진다 風文 2023.04.06 768
229 나의 음악 레슨 선생님 風文 2023.04.07 955
228 혈당 관리가 중요한 이유 風文 2023.04.13 887
227 바쁘다는 것은 風文 2023.04.13 892
226 첫눈에 반한 사랑 風文 2023.04.16 825
225 분을 다스리기 힘들 때 風文 2023.04.16 637
224 나만의 고독한 장소 風文 2023.04.16 648
223 내 인생은 내가 산다 風文 2023.04.17 698
222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그리스의 자연 風文 2023.04.17 818
221 가슴 터지도록 이 봄을 느끼며 風文 2023.04.18 642
220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고대문명 風文 2023.04.18 887
219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셨던 말 風文 2023.04.19 914
218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2.그리스의 조소미술과 도자기 風文 2023.04.19 829
217 사자와 오랑우탄 風文 2023.04.20 998
216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2.1 風文 2023.04.20 855
215 내가 놓치고 있는 것 風文 2023.04.21 994
214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2.3,4 風文 2023.04.21 1065
213 단단한 믿음 風文 2023.04.24 1117
212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5, 6, 7 風文 2023.04.24 1101
211 젊은이가 사라진 마을 風文 2023.04.25 91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