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7.21 18:04

개울과 바다 - 도종환

조회 수 9508 추천 수 2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개울은 제가 그저 개울인 줄 안다
  산골짝에서 이름 없는 돌멩이나 매만지며
  밤에는 별을 안아 흐르고 낮에는 구름을 풀어
  색깔을 내며 이렇게 소리없이
  낮은 곳을 지키다 가는 물줄기인 줄 안다
  물론 그렇게 겸손해서 개울은 미덥다
  개울은 제가 바다의 핏줄임을 모른다
  바다의 시작이요 맥박임을 모른다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소읍의 변두리를 흐린 낯빛으로 지나가거나
  어떤 때는 살아 있음의 의미조차 잊은 채
  떠밀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고 있는 줄로 안다
  쏘가리나 피라미를 키우는 산골짝 물인지 안다
  그러나 가슴속 그 물빛으로 마침내
  수천 수만 바닷고기를 자라게 하고
  어선만한 고래도 살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 개울은 알게 될 것이다
  제가 곧 바다의 출발이며 완성이었음을
  멈추지 않고 흐른다면
  그토록 꿈꾸던 바다에 이미 닿아 있다는 걸
  살아 움직이며 쉼없이 흐른다면
  
  「개울」이란 제 시입니다. 골짜기에서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개울입니다. 개울은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물입니다. 그저 쏘가리나 피라미가 사는 산골짝 물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바다도 개울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개울은 비록 낮은 곳에 있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물이지만 그 개울 하나 하나가 바다의 핏줄이었던 것입니다. 바다의 시작이요 맥박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까지 가려면 멈추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살아 움직이면서 쉼 없이 흘러야 합니다. 주저앉거나 포기하면 그 순간부터 개울은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맑은 모습으로 흘러야 합니다.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므로 개울물이 맑은 것입니다. 그래야 바다의 출발이고 완성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개울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핏줄처럼 다른 물들과 연결되어 있고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 바다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도종환/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5942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5424
3033 153세 냉동인간이 부활했다? - 냉동인간에 대하여 바람의종 2007.09.19 46941
3032 ‘옵아트’ 앞에서 인간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된다! 바람의종 2007.08.15 46456
3031 '푸른 기적' 風文 2014.08.29 39249
3030 사랑이 잔혹한 이유는 에로스 신 부모 탓? 바람의종 2008.03.27 26542
3029 쥐인간의 죄책감은 유아기적 무의식부터? - 강박증에 대하여 바람의종 2007.10.10 25408
3028 행복과 불행은 쌍둥이 형제라고? 바람의종 2007.08.09 22598
3027 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125) 바람의종 2009.02.02 21656
3026 희망이란 風文 2013.08.20 19501
3025 현대예술의 엔트로피 바람의종 2008.04.09 18978
3024 '야하고 뻔뻔하게' 風文 2013.08.20 18848
3023 정말 당신의 짐이 크고 무겁습니까? 바람의종 2007.10.10 18800
3022 136명에서 142명쯤 - 김중혁 윤영환 2006.09.02 18584
3021 Love is... 風磬 2006.02.05 18338
3020 그가 부러웠다 風文 2013.08.28 18249
3019 다다이즘과 러시아 구성주의에 대하여 바람의종 2010.08.30 17887
3018 커피 한 잔의 행복 風文 2013.08.20 17578
3017 히틀러는 라디오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바람의종 2008.08.05 17094
3016 자연을 통해... 風文 2013.08.20 16708
3015 젊은이들에게 - 괴테 바람의종 2008.02.01 16478
3014 흉터 風文 2013.08.28 16433
3013 세계 최초의 아나키스트 정당을 세운 한국의 아나키스트 바람의종 2008.07.24 15497
3012 방 안에 서있는 물고기 한 마리- 마그리트 ‘낯설게 하기’ 바람의종 2007.02.08 15490
3011 길 떠날 준비 風文 2013.08.20 1541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