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6.27 11:22

빈 병 가득했던 시절

조회 수 6139 추천 수 2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빈 병 가득했던 시절








 연극배우가 늘 배고픈 건 아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보다 배고픈 날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십수 년 전 내가 가장 즐거워했던 자리는 삼겹살에 소주 또는 통닭에 생맥주가 있는 술자리였다. 몇 끼를 굶었건 얼마나 오래 연습을 했건 그런 술자리가 있으면 나는 흥분했고 어느새 행복해졌다. 지금까지도 몇몇 그때의 술자리들은 가슴 구석에 아련히 모셔져 있다. 제법 유명해진 요즘은 원 없이 그때처럼 먹을 수 있지만, 그때의 맛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

 언제인지 어떤 자리인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그날은 ‘따따블의 날’이었다. 삼겹살에 소주, 통닭에 생맥주가 이어지는 술자리였으니 말이다. 흥분된 만취 상태로 밤을 찢어 새벽을 맞이했고 첫차 뒷좌석에 실려 자취방에 들어왔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술은 못 깨고 겨우 잠만 깨 냄새나는 자취방을 나와 연습실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차비가 없음을 확인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동전을 찾기 시작했다. 삼십 여 분 후 손아귀에 들어온 돈은 오십 원. 그때 물가로 백 원이 부족했다. 걸어서 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연습실, 작은 절망이 몰려왔다. 염치없이 옆집에서 빌릴 수도 없고 운전기사에게 사정하기도 쪽팔리고…. 평소 잔머리 잘 굴린다 소리 듣던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공연도 아니고 연습인데 뭘…. 원래 성실한 놈도 아니구, 에잇, 양말이나 빨자.’
 신발장 옆에는 스무 짝이 넘는 양말이 쌓여 있었다. 대야를 가져와 양말을 담으려는 순간 신발장 옆에 수북이 쌓인 빈 병들에 시선이 꽂혔다. ‘가만, 저게 얼마야?’ 삼십 병도 거뜬히 넘는 빈 병들을 세어 보니 거의 천 원에 육박했다. 차비가 문젠가, 담배까지 살 수 있었다. 하하. 갑자기 천하를 얻은 기분. 정류장에서 담배 한 개비를 아주 건방지게 태우고 보무당당히 버스에 올라탔다.

 그 시절은 그렇게 늘 아슬아슬했고 오늘 벌어 내일을 버텨야 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일치했으니, 한 끼 굶어 술이었고 동가식서가숙이었지만 늘 행복했고 신났다.

 삼겹살에 소주, 통닭에 생맥주 한번 원 없이 먹어 본 적 없던 그 시절의 술자리. 그 잊을 수 없는 맛을 또다시 좋은 벗들과 느껴보고 싶다.


박철민 님 | 배우
-《행복한동행》2008년 6월호 중에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5156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4611
185 조용한 응원 風文 2019.08.08 751
184 심리치유 과정에서 조심할 일 風文 2023.02.15 751
183 좋은 관상 風文 2021.10.30 750
182 잠깐의 여유 風文 2022.01.26 748
181 위대한 인생 승리자 風文 2023.11.14 748
180 아프지 말아요 風文 2019.08.24 747
179 어리석지 마라 風文 2019.08.30 746
178 '자기한테 나는 뭐야?' 風文 2023.05.19 745
177 있는 그대로 風文 2023.12.05 745
176 거절을 열망하라 - 릭 겔리나스 風文 2022.10.06 743
175 사람 만드는 목수 風文 2023.11.09 743
174 남 따라한 시도가 가져온 성공 - TV 프로듀서 카를라 모건스턴 風文 2022.08.27 742
173 이방인의 애국심 風文 2020.07.03 741
172 거절을 우아하게 받아들여라 風文 2022.10.09 741
171 내면의 거울 風文 2023.01.11 741
170 습득하는 속도 風文 2023.02.28 741
169 너무 고민 말고 도움을 청하라 風文 2020.05.05 740
168 늘 옆에 있어주는 사람 風文 2022.01.28 740
167 내려야 보입니다 風文 2021.09.02 739
166 감동과 행복의 역치가 낮은 사람 風文 2023.02.11 739
165 아이에게 '최고의 의사'는 누구일까 風文 2023.11.13 739
164 선택의 기로 風文 2020.05.14 738
163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風文 2022.06.04 736
162 어디로 갈지... 風文 2019.08.14 733
161 적군까지도 '우리는 하나' 風文 2021.09.06 73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