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5.02 11:13

젖은 꽃잎 / 도종환

조회 수 9638 추천 수 1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젖은 꽃잎 / 도종환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대신 비가 밤새 왔다
  이 산 속에서 자랑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산벚나무가 환하게 꽃을 피운 연분홍 꽃그늘과
  꽃 사이 사이를 빈틈 하나 없이 파랗게 채운
  한낮의 하늘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젖은 꽃들은 진종일 소리 없이 지고
  나무는 천천히 평범한 초록 속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오후 내내 도라지 밭을 매었다
  밭을 점점이 덮은 꽃잎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함께 묻혔다
  그댄 지금 어느 산을 넘는지 물어볼 수도 없어
  세상은 흐리고 다시 적막하였다
  
  -「젖은 꽃잎」

  
  제 시 「젖은 꽃잎」입니다. 봄에 피었던 꽃들이 지고 있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렸던 꽃들은 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초록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꽃잎도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거기 함께 묻히는 걸 바라봅니다. 꽃이 필 때도 가슴 설레지만 꽃이 질 때는 더 가슴 떨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붙잡을 수도 있지만 지는 꽃은 잡을 수도 없습니다.
  
  며칠만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은데 그 며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꼭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꽃이 피어 있는 동안 더 가까이 가 바라보고 사랑해 주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그대와 함께 이 꽃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대에게 연분홍 꽃과 꽃 사이를 가득 채운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대와의 인연은 멀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꽃잎이 먼저 스스로를 버리는 날 비가 내렸고 세상은 온종일 흐리고 적막하였습니다. 어디에 계시는지요, 젖은 꽃잎 같은 그대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3081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2437
2935 소망적 사고 윤영환 2013.06.05 11407
2934 치유의 문 風文 2014.10.18 11386
2933 고통은 과감히 맞서서 해결하라 - 헤르만 헷세 風磬 2006.11.02 11347
2932 엄창석,<색칠하는 여자> 바람의종 2008.02.28 11336
2931 風文 2014.10.20 11325
2930 불을 켜면 사라지는 꿈과 이상, 김수영 「구슬픈 肉體」 바람의종 2007.03.09 11305
2929 하루 한 번쯤 바람의종 2012.10.29 11305
2928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면 바람의종 2008.07.31 11270
2927 모퉁이 風文 2013.07.09 11253
2926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루쉰, 사실은 의사 지망생이었다? 바람의종 2007.02.28 11244
2925 김인숙 <거울에 관한 이야기> 바람의종 2008.02.29 11190
2924 아흔여섯살 어머니가... 윤안젤로 2013.06.05 11168
2923 한숨의 크기 윤안젤로 2013.05.20 11136
2922 여섯 개의 버찌씨 바람의종 2009.05.04 11106
2921 "'거룩한' 바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바람의종 2009.03.31 11096
2920 친애란 무엇일까요? 바람의종 2007.10.24 11052
2919 권력의 꽃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11032
2918 초점거리 윤안젤로 2013.03.27 11013
2917 「개는 어떻게 웃을까」(시인 김기택) 바람의종 2009.05.28 11001
2916 '할 수 있다' 윤안젤로 2013.06.15 10950
2915 그냥 서 있는 것도 힘들 때 風文 2014.11.12 10931
2914 밤새 부르는 사랑 노래 윤안젤로 2013.05.27 10913
2913 감춤과 은둔 風文 2015.08.20 10879
2912 저녁의 황사 - 도종환 (134) 바람의종 2009.03.01 10845
2911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들 風文 2014.11.12 1077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