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5.02 11:13

젖은 꽃잎 / 도종환

조회 수 9617 추천 수 1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젖은 꽃잎 / 도종환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대신 비가 밤새 왔다
  이 산 속에서 자랑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산벚나무가 환하게 꽃을 피운 연분홍 꽃그늘과
  꽃 사이 사이를 빈틈 하나 없이 파랗게 채운
  한낮의 하늘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젖은 꽃들은 진종일 소리 없이 지고
  나무는 천천히 평범한 초록 속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오후 내내 도라지 밭을 매었다
  밭을 점점이 덮은 꽃잎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함께 묻혔다
  그댄 지금 어느 산을 넘는지 물어볼 수도 없어
  세상은 흐리고 다시 적막하였다
  
  -「젖은 꽃잎」

  
  제 시 「젖은 꽃잎」입니다. 봄에 피었던 꽃들이 지고 있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렸던 꽃들은 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초록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꽃잎도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거기 함께 묻히는 걸 바라봅니다. 꽃이 필 때도 가슴 설레지만 꽃이 질 때는 더 가슴 떨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붙잡을 수도 있지만 지는 꽃은 잡을 수도 없습니다.
  
  며칠만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은데 그 며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꼭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꽃이 피어 있는 동안 더 가까이 가 바라보고 사랑해 주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그대와 함께 이 꽃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대에게 연분홍 꽃과 꽃 사이를 가득 채운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대와의 인연은 멀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꽃잎이 먼저 스스로를 버리는 날 비가 내렸고 세상은 온종일 흐리고 적막하였습니다. 어디에 계시는지요, 젖은 꽃잎 같은 그대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2543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1959
160 생각의 집부터 지어라 바람의종 2008.07.12 6402
159 왕이시여,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바람의종 2008.07.09 8156
158 후배 직원을 가족같이 사랑하라 바람의종 2008.07.09 6999
157 이장님댁 밥통 외등 바람의종 2008.07.04 8883
156 얼굴빛 바람의종 2008.07.03 6553
155 雨中에 더욱 붉게 피는 꽃을 보며 바람의종 2008.07.01 7831
154 빈 병 가득했던 시절 바람의종 2008.06.27 6079
153 그 시절 내게 용기를 준 사람 바람의종 2008.06.24 7719
152 여린 가지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23 7830
151 길 떠나는 상단(商團) 바람의종 2008.06.23 9080
150 목민관이 해야 할 일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21 7237
149 우산 바람의종 2008.06.19 7259
148 지금 아니면 안 되는 것 바람의종 2008.06.13 7142
147 화려한 중세 미술의 철학적 기반 바람의종 2008.06.11 8129
146 매일 새로워지는 카피처럼 바람의종 2008.06.11 5694
145 촛불의 의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09 7960
144 이로움과 의로움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07 6896
143 등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02 7946
142 폐허 이후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31 8389
141 일상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바람의종 2008.05.31 6966
140 가장 큰 재산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29 8786
139 느낌의 대상에서 이해의 대상으로? 바람의종 2008.05.27 4584
138 매너가 경쟁력이다 바람의종 2008.05.27 5283
137 오늘 다시 찾은 것은 바람의종 2008.05.26 7266
136 초록 꽃나무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23 1024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