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5.02 11:13

젖은 꽃잎 / 도종환

조회 수 9641 추천 수 1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젖은 꽃잎 / 도종환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대신 비가 밤새 왔다
  이 산 속에서 자랑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산벚나무가 환하게 꽃을 피운 연분홍 꽃그늘과
  꽃 사이 사이를 빈틈 하나 없이 파랗게 채운
  한낮의 하늘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젖은 꽃들은 진종일 소리 없이 지고
  나무는 천천히 평범한 초록 속으로
  돌아가는 걸 보며
  오후 내내 도라지 밭을 매었다
  밭을 점점이 덮은 꽃잎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함께 묻혔다
  그댄 지금 어느 산을 넘는지 물어볼 수도 없어
  세상은 흐리고 다시 적막하였다
  
  -「젖은 꽃잎」

  
  제 시 「젖은 꽃잎」입니다. 봄에 피었던 꽃들이 지고 있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렸던 꽃들은 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초록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꽃잎도 흙에 묻히고 꽃 향기도 거기 함께 묻히는 걸 바라봅니다. 꽃이 필 때도 가슴 설레지만 꽃이 질 때는 더 가슴 떨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붙잡을 수도 있지만 지는 꽃은 잡을 수도 없습니다.
  
  며칠만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은데 그 며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는 꽃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꼭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꽃이 피어 있는 동안 더 가까이 가 바라보고 사랑해 주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그대와 함께 이 꽃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대에게 연분홍 꽃과 꽃 사이를 가득 채운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대와의 인연은 멀고 꽃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꽃잎이 먼저 스스로를 버리는 날 비가 내렸고 세상은 온종일 흐리고 적막하였습니다. 어디에 계시는지요, 젖은 꽃잎 같은 그대는.




 

  1. No Image notice by 風文 2023/02/04 by 風文
    Views 13123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2. 친구야 너는 아니

  3. 현대예술의 엔트로피

  4. No Image 09Apr
    by 바람의종
    2008/04/09 by 바람의종
    Views 8466 

    화개 벚꽃 / 도종환

  5. No Image 10Apr
    by 바람의종
    2008/04/10 by 바람의종
    Views 9998 

    4월 이야기

  6. No Image 11Apr
    by 바람의종
    2008/04/11 by 바람의종
    Views 6769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 납니다

  7. No Image 11Apr
    by 바람의종
    2008/04/11 by 바람의종
    Views 6147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학교

  8. No Image 11Apr
    by 바람의종
    2008/04/11 by 바람의종
    Views 9537 

    소를 보았다

  9. No Image 14Apr
    by 바람의종
    2008/04/14 by 바람의종
    Views 7067 

    네비게이션에 없는 길 / 도종환

  10. 행복한 미래로 가는 오래된 네 가지 철학

  11. No Image 16Apr
    by 바람의종
    2008/04/16 by 바람의종
    Views 8434 

    행운에 짓밟히는 행복

  12. No Image 16Apr
    by 바람의종
    2008/04/16 by 바람의종
    Views 6802 

    자족에 이르는 길 / 도종환

  13. No Image 17Apr
    by 바람의종
    2008/04/17 by 바람의종
    Views 6642 

    아배 생각 - 안상학

  14. No Image 18Apr
    by 바람의종
    2008/04/18 by 바람의종
    Views 13074 

    산벚나무 / 도종환

  15. No Image 21Apr
    by 바람의종
    2008/04/21 by 바람의종
    Views 9384 

    용연향과 사람의 향기 / 도종환

  16. No Image 22Apr
    by 바람의종
    2008/04/22 by 바람의종
    Views 8706 

    행복한 농사꾼을 바라보며

  17. 교환의 비밀: 가난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18. No Image 24Apr
    by 바람의종
    2008/04/24 by 바람의종
    Views 7016 

    섬기고 공경할 사람 / 도종환

  19. No Image 25Apr
    by 바람의종
    2008/04/25 by 바람의종
    Views 7275 

    입을 여는 나무들 / 도종환

  20. No Image 25Apr
    by 바람의종
    2008/04/25 by 바람의종
    Views 5794 

    마음으로 소통하라

  21. No Image 28Apr
    by 바람의종
    2008/04/28 by 바람의종
    Views 8641 

    참는다는 것 / 도종환

  22. 시간은 반드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23. No Image 29Apr
    by 바람의종
    2008/04/29 by 바람의종
    Views 6969 

    하나의 가치

  24. No Image 30Apr
    by 바람의종
    2008/04/30 by 바람의종
    Views 5408 

    만족과 불만 / 도종환

  25. No Image 02May
    by 바람의종
    2008/05/02 by 바람의종
    Views 9641 

    젖은 꽃잎 / 도종환

  26. No Image 05May
    by 바람의종
    2008/05/05 by 바람의종
    Views 6471 

    어린이라는 패러다임 / 도종환

  27. 원초적인 생명의 제스처, 문학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