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04.18 11:40

산벚나무 / 도종환

조회 수 13237 추천 수 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산벚나무 / 도종환




아직 산벚나무 꽃은 피지 않았지만
개울물 흘러내리는 소리 들으며
가지마다 살갗에 화색이 도는 게 보인다
나무는 희망에 대하여 과장하지 않았지만
절망을 만나서도 작아지지 않았다
묵묵히 그것들의 한복판을 지나왔을 뿐이다
겨울에 대하여
또는 봄이 오는 소리에 대하여
호들갑떨지 않았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경박해지지 않고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요란하지 않았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갈 줄 알았다
절망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듯
희망도 무서워할 줄 알면서*


제 시 「산벚나무」입니다. 제가 있는 산방 뒤뜰에는 산벚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봄이면 연분홍 산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는 그 산벚나무가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눈 내리고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을 묵묵히 견뎌 준 게 고마워 나는 산벚나무를 양팔로 꼭 껴안아주고 얼굴을 부빕니다.

산벚나무는 봄이 온다고 호들갑떨지 않습니다. 겨울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굴하거나 경박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고, 길이 조금만 보이면 요란을 떨거나 거만해지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절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용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든 하찮게 여기지 말고 정확하게 응시하며 헤쳐 나가는 일이 중요하지요. 희망을 만났을 때도 원하던 것을 다 이룬 것처럼 들뜨지 말고 과욕을 경계하고 그것이 덫이 되지 않도록 삼갈 줄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묵묵히 겨울을 견디고 아름답게 꽃피운 뒤에도 소박한 자세를 잃지 않는 산벚나무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배웁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6235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5649
135 희망의 바깥은 없다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10726
134 자기암시, 자기최면 風文 2014.12.04 10736
133 사랑을 잃으면... 風文 2015.08.20 10737
132 기꺼이 '깨지는 알' 윤안젤로 2013.03.20 10778
131 사치 風文 2013.07.07 10793
130 깜빡 잊은 답신 전화 윤영환 2013.06.28 10802
129 내 마음 닿는 그곳에 윤안젤로 2013.06.03 10802
128 안병무 '너는 가능성이다' 中 바람의종 2008.02.17 10829
127 첫눈 오는 날 만나자 風文 2015.08.09 10863
126 '갓길' 風文 2014.09.25 10912
125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들 風文 2014.11.12 10936
124 '할 수 있다' 윤안젤로 2013.06.15 10996
123 그냥 서 있는 것도 힘들 때 風文 2014.11.12 10997
122 밤새 부르는 사랑 노래 윤안젤로 2013.05.27 11004
121 감춤과 은둔 風文 2015.08.20 11069
120 저녁의 황사 - 도종환 (134) 바람의종 2009.03.01 11082
119 초점거리 윤안젤로 2013.03.27 11090
118 「개는 어떻게 웃을까」(시인 김기택) 바람의종 2009.05.28 11091
117 친애란 무엇일까요? 바람의종 2007.10.24 11133
116 권력의 꽃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11157
115 한숨의 크기 윤안젤로 2013.05.20 11210
114 "'거룩한' 바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바람의종 2009.03.31 11217
113 아흔여섯살 어머니가... 윤안젤로 2013.06.05 11223
112 여섯 개의 버찌씨 바람의종 2009.05.04 11226
111 김인숙 <거울에 관한 이야기> 바람의종 2008.02.29 1127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