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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3 18:13

어머니의 사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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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사재기


손택수 < 시인 >

서점에 시장조사를 나갔다 온 출판사 동료가 책을 한 권 사왔다. 우리 출판사의 신간이었다. 사재기를 했네? 요즘 사재기 감시단이 활동하고 있는 거 몰라? 농을 건네자 동료는 배시시 웃는 낯빛으로 급하게 선물할 데가 있어서요,하고 답한다.

사재기에 관해선 솔직히 나도 할 말이 없다. 첫 시집을 냈을 때의 일이었나 보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 몇 년을 기다리다 낸 시집이었으니 감격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 작품집이 미지(未知)의 독자들과 만난다는 기대만으로도 충분히 흥분이 됐다. 그러나 워낙 팔리지 않는 게 시집이다 보니 시집 판매에 대해선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냥,몇몇의 독자라도 내 시에 공감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시란 본디 비밀결사 같은 소수자의 언어가 아니던가. 표준어가 아닌 방언처럼 나누는 게 시가 아니던가.

그런데 어느날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느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내 시집이 몇 주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살갗을 살짝 꼬집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친구의 전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그 서점엘 갔다. 분명 꿈이 아니었다. 베스트셀러 1위에 내 이름과 시집 제목이 당당히 올라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꾸욱 눌러 참는 고통을 지그시 음미하며 여느 독자들처럼 다른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 마당에 이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이제 머잖아 출판사에서 연락이 올 것이고 내 통장엔 인세(印稅)가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그리고 출판사와 잡지사들의 구애가 경쟁적으로 잇따를 것이다. 이제는 이 모든 구애를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을 익혀야 될지도 모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행복감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나는 시내의 다른 대형서점을 찾았다. 자신의 책을 구입하는 독자를 서점에서 만나면 '대박'이 난다는 속설이 있는데,기왕 나선 김에 그 미지의 독자까지 만나볼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미지의 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 어디에도 내 이름은 올라있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또 하나의 서점을 찾아보았다. 역시 내 시집을 보는 독자는 없었고,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도 없었다. 용기를 내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한 달 내내 2권이 팔린 게 전부라고 했다. 끝없이 부풀어오르던 백일몽이 풀썩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허탈을 곱씹고 나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내 시집이 베스트셀러를 장식했던 그 서점은 화장품 방문판매를 다니시는 어머니의 직장 부근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가 메고 다니시는 화장품 가방을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가방 속에서 시집이 쏟아져 나왔다. 내처 묵은 장부를 펼치자 고객들의 이름 옆에 적어놓은 '시집 외상값 오천원'이 또박또박 눈에 들어왔다. 시집 외상값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화장품 가방 속에 어머니는 못난 아들의 시집을 넣고 다니며 아무도 고용하지 않은 시집 외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라던 시집이 어머니에게 짐만 되고 있었다니….

어머니의 시집 사재기와 외판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됐다. 만류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언젠가부터 외판도 여의치 않고 수금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지 집안에 시집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더 깊어졌다. 나처럼 죄스런 사재기가 과연 어디 있을까. 이후로 시집을 낸다면 어머니 몰래 내리라. 어머니 짐이나 되는 시집 따윈 다시 내지 않으리라.

몇 년 뒤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알았으면 나라도 나서서 좀 샀을 텐데 왜 말을 하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그땐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들려주고 싶다. '어머니,어머니가 제겐 '대박'을 주는 그 미지의 독자였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독자가 바로 어머니였다는 걸 이제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사재기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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