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22 09:31

몰래 요동치는 말

조회 수 141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몰래 요동치는 말

아무래도 나는 좀스럽고 쪼잔하다. 하는 공부도 장쾌하지 못하여 ‘단어’에 머물러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말에도 별 관심이 없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속에선 요동치는 말에 관심 가지는 정도. 이를테면, ‘연필을 깎다’와 ‘사과를 깎다’에 쓰인 ‘깎다’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 뜻이 한발짝 옆으로 옮아간 ‘물건값을 깎다’도 아니고, 그저 ‘연필’과 ‘사과’에 쓰인 ‘깎다’ 정도.

연필 깎는 칼과 사과 깎는 칼은 다르다. 연필 깎는 칼은 네모나고 손가락 길이 정도인 데다가 직사각형이다. 과일 깎는 칼은 끝이 뾰족하고 손을 폈을 때의 길이 정도이다. 연필은 바깥쪽으로 칼질하지만, 사과는 안쪽으로 해야 한다.

연필은 집게손가락 첫째 마디 위에 연필 끝을 올려놓고 반대편 손 엄지손가락으로 칼등을 밀어내며 깎는다. 사과는 손바닥으로 사과를 움켜쥐고 반대편 손은 사과 표면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넓게 벌렸다가 집게손가락에 닿아 있는 칼등을 엄지손가락이 있는 데까지 끌어당기면서 깎는다. 둘은 다르다고 해야겠군!

그래도 깎는 건 깎는 거니까 같다고? 좋다. 그러면 둘 다 같은 칼로, 같은 방향으로 깎는다고 치자. 그러면, 둘은 같은가? 행위에는 목적이나 결과가 있다. 연필을 깎으면 글을 쓰지만, 사과를 깎으면 먹는다. 두 동작(작동)의 목표와 결과는 다르다.

‘깎다’라는 말은 관념 속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물과 연결된 미세한 행동방식과 함께 몸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온 감각을 동원하여 지각하며 이해하며 행위한다. 말은 말 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외부 환경에 조응하는 몸의 감각과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좀스럽긴 하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63198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9955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24620
3348 연말용 상투어 風文 2022.01.25 1452
3347 모호하다 / 금쪽이 風文 2023.10.11 1453
3346 짧아져도 완벽해, “999 대 1” 風文 2022.08.27 1454
3345 속담 순화, 파격과 상식 風文 2022.06.08 1455
3344 다만, 다만, 다만, 뒷담화 風文 2022.09.07 1455
3343 개헌을 한다면 風文 2021.10.31 1457
3342 날아다니는 돼지, 한글날 몽상 風文 2022.07.26 1457
3341 역사와 욕망 風文 2022.02.11 1459
3340 말의 세대 차 風文 2023.02.01 1459
3339 좋은 목소리 / 좋은 발음 風文 2020.05.26 1460
3338 소통과 삐딱함 風文 2021.10.30 1461
3337 왜 벌써 절망합니까 - 8. 미래를 창조하는 미래 風文 2022.05.17 1464
3336 북혐 프레임, 인사시키기 風文 2022.05.30 1465
3335 깻잎 / 기림비 1 風文 2020.06.01 1466
3334 고백하는 국가, 말하기의 순서 風文 2022.08.05 1466
3333 인과와 편향, 같잖다 風文 2022.10.10 1467
3332 조의금 봉투 風文 2023.11.15 1467
3331 남과 북의 언어, 뉘앙스 차이 風文 2022.06.10 1468
3330 잃어버린 말 찾기, ‘영끌’과 ‘갈아넣다’ 風文 2022.08.30 1471
3329 비계획적 방출, 주접 댓글 風文 2022.09.08 1474
3328 영어의 힘 風文 2022.05.12 1475
3327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이제 '본전생각' 좀 버립시다 風文 2022.02.06 147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