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3.06 06:34

“김”

조회 수 204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날 내 입에서도 더운 김이 솔솔 나온다. 모양이 일정치 않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이내 허공에서 사라진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이치를 집안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으로 이만한 게 없다.

‘김’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장 보는 김에 머리도 깎았다’처럼 ‘~하는 김에’라는 표현을 이루어 두 사건을 이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앞뒤 사건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게 아니다. 앞일을 발판 삼아 뒷일을 한다는 뜻이다. ‘장을 보고 머리를 깎았다’와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계기가 없다면 뒷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었겠지. 기왕 벌어진 일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용기를 낸다. ‘말 나온 김에 털고 가자.’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 변화를 위해선 뭐든 하고 있어야 하려나.

‘~하는 김에’가 숨겨둔 일을 자극한다는 게 흥미롭다. 잠깐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수증기를 보고 뭔가를 더 얹는 상황을 상상하다니. 순발력 넘치는 표현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6301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9738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24417
3348 매기다와 메기다 바람의종 2010.03.12 19697
3347 죄다, 죄여, 조이다, 조여 바람의종 2010.06.20 19511
3346 배부, 배포 바람의종 2012.03.05 19369
3345 볼장 다보다 바람의종 2008.01.13 19359
3344 학을 떼다, 염병, 지랄 바람의종 2010.02.09 19346
3343 폭탄주! 말지 말자. 바람의종 2012.12.17 19335
3342 널브러지다, 널부러지다, 너부러지다 바람의종 2010.06.16 19309
3341 알콩달콩, 오순도순, 아기자기, 오밀조밀 바람의종 2009.03.08 19306
3340 수입산? 외국산? 바람의종 2012.12.03 19094
3339 빌려 오다, 빌려 주다, 꾸다, 뀌다 바람의종 2010.07.25 19007
3338 주접떨다, 주접든다 바람의종 2009.03.23 18891
3337 초생달 / 초승달, 으슥하다 / 이슥하다, 비로소 / 비로서 바람의종 2011.11.15 18884
3336 황제 바람의종 2012.11.02 18839
3335 "드리다"의 띄어쓰기 바람의종 2009.09.01 18834
3334 야단법석, 난리 법석, 요란 법석 바람의종 2012.06.11 18824
3333 차후, 추후 바람의종 2012.06.15 18703
3332 환갑 바람의종 2007.10.06 18608
3331 박물관은 살아있다 바람의종 2012.11.30 18575
3330 하모, 갯장어, 꼼장어, 아나고, 붕장어 바람의종 2010.07.19 18355
3329 담배 한 까치, 한 개비, 한 개피 바람의종 2010.10.16 18129
3328 등용문 바람의종 2013.01.15 18118
3327 '-화하다' / '-화시키다' 바람의종 2009.08.29 1811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