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13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맞다’와 ‘맞는다’

몇 주 전 원고에 “불문율이 언어의 본질에 맞다”고 했더니 신문엔 “맞는다”로 고쳐 실렸다. 넷플릭스 영화를 봐도 등장인물은 ‘맞다’라 하는데 자막엔 늘 ‘맞는다’로 나온다. ‘‘맞다’는 무조건 ‘맞는다’로 고쳐 쓰라’는 지침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도 한결같아서 찾아보니, ‘맞다’는 동사이고 동사의 현재형에는 ‘-는-’을 붙여야 하므로 ‘맞는다’가 맞다(!)는 것. 하지만 ‘맞다’는 동사와 형용사를 넘나드는 존재다. 이름하여 ‘형용사적 동사’ 또는 ‘형용성 동사’. 왜 이런 이름이 달렸을까? 우리가 그렇게 쓰기 때문이다.

동사는 ‘먹어라, 먹자’처럼 명령이나 청유형이 가능하다. 안 그러면 형용사다. ‘맞다’는 ‘(이 옷이) 맞아라, 맞자’라고 안 쓴다. 감탄할 때 동사는 ‘먹는구나’처럼 ‘-는구나’를, 형용사는 ‘춥구나’처럼 ‘-구나’를 붙인다. ‘맞다’는 ‘맞는구나’로도 ‘맞구나’로도 쓴다. 형용사는 ‘와, 맛있다! 멋지다!’처럼 기본꼴로 감탄사처럼 쓸 수 있다. ‘맞다’도 비슷하다. 비 그친 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맞다, 우산!’, 머리 아플 땐, ‘맞다, 게○○!’.

‘맞다’가 동사인지, 형용사인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반응하는 모습이 문제다. 누군가 ‘이게 맞다’고 하면, 자기 입에 붙어 자연스럽게 쓰는 말을 너무 쉽게 부정하고 고친다. 이 일사불란함이 지루하다.

말은 늘 변한다. 전문가는 풍속의 감시자가 아니라, 변화를 받아 적고 설명하는 존재일 뿐이다. 고칠 건 사전이나 설명이지, 당신의 말이 아니다. 명령에 거역하라.



이름 바꾸기

내 이름은 웃긴다. 발음이 절지동물과 닮아 별명이 ‘왕지네’였다. 모르는 이에게 이름을 불러주면 열에 아홉 ‘진혜’나 ‘진회’로 적는다. “‘바다 해’ 자입니다”라거나 “해바라기 할 때 해 자입니다”, “‘ㅕㅣ’가 아니라 ‘ㅏㅣ’예요”라 해야 한다. 어감도 묵직하거나 톡 쏘는 맛이 없어서, 줏대도 없고 집요함도 모자란다. 이게 다 이름 탓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어야 할까? 우리 사회는 걸핏하면 이름을 바꾸던데. 사람들 반응이 시들하고 전망이 안 보이고 시대에 뒤처진 느낌일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이름 바꾸기다. 회사명, 주소명, 건물명, 학과명, 가게명, 정당명, 정부 부처명. 불합리를 바로잡고 합리성과 혁신 의지를 듬뿍 담아! 한국 현대사는 간판 교체사이다.

이름 바꾸기는 연속성의 거부이자 과거와 단절하려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대부분 근본적이지 않고 선택적이라는 게 문제다. 실패하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만 지목될 뿐.

모든 이름에는 이름의 질감이 있다. 이름을 그대로 두면 부끄럽고 불합리하며 분했던 순간도 도망가지 못한다. 나는 그 질감이 좋다. 그 부끄러움과 불합리가 좋다. 우여곡절을 겪는 의미를 같은 이름 안에 쌓아 놓는 것. 의미는 시시때때로 변하는데, 이름마저 자주 바뀌면 어지럼증이 심해진다. 나는 문화라는 게 ‘이유는 잘 모르지만, 옛날부터 그렇게 써 왔어’라고 말하는 거라 생각한다. 단절은 세탁과 표백의 상큼함과 뽀송함을 줄지는 몰라도, 역사의 냄새와 질감을 회피하게도 만든다. 이름 바꾸기를 성과로 내세우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0260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6786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1769
3260 붙이다, 부치다 바람의종 2012.01.07 15949
3259 ‘뜨더국’과 ‘마치다’ 바람의종 2010.04.02 15932
3258 ‘감투’와 ‘망탕’ 바람의종 2010.03.23 15891
3257 어안이 벙벙하다 바람의종 2008.01.25 15890
3256 알토란 같다 바람의종 2008.01.24 15878
3255 께 / 게 바람의종 2010.08.27 15873
3254 쥐어 주다, 쥐여 주다 바람의종 2008.09.23 15815
3253 빗어 주다, 빗겨 주다 바람의종 2009.10.06 15787
3252 유돌이, 유도리 바람의종 2011.12.04 15659
3251 안치다, 안히다 / 무치다, 묻히다 바람의종 2009.05.01 15638
3250 끝발, 끗발 바람의종 2010.03.17 15632
3249 고명딸 風磬 2006.09.16 15609
3248 똔똔 / 도긴 개긴 바람의종 2012.07.13 15577
3247 '꼴' 띄어쓰기 바람의종 2012.09.19 15575
3246 흡인력, 흡입력 바람의종 2009.11.12 15561
3245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바람의종 2008.01.26 15528
3244 잎, 잎새, 잎사귀, 이파리 바람의종 2009.10.02 15511
3243 않는, 않은 바람의종 2008.09.29 15486
3242 휫바람, 휘바람, 휘파람 바람의종 2009.06.30 15481
3241 곤죽 바람의종 2010.04.17 15466
3240 한번과 한 번 1 바람의종 2010.08.14 15453
3239 고뿔 風磬 2006.09.16 1544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