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16 09:55

쓰봉

조회 수 83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쓰봉

권대웅의 시 ‘쓰봉 속 십만 원’은 ‘벗어놓은 쓰봉 속주머니에 십만 원이 있다’로 시작한다.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된 노모가 집에 두고 온 당신의 전 재산을 자식들이 모르고 지나칠까 봐 일러주는 말이다.

‘쓰봉’은 바지를 뜻하는 일본말로 일제 시대에 들어와 1970년대까지 널리 쓰였다. 국어순화 운동에 힘입어 ‘와리바시(나무젓가락), 벤또(도시락), 다마네기(양파)’ 등과 함께 이제는 우리말에서 사라져버린 말이다. 중장년 세대는 대부분 알고 있는 말이지만 젊은이들에게 ‘쓰봉’은 낯선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젊은 주부들이 ‘쓰봉’이란 말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말이, 그것도 어렵게 쫓아낸 일본어 외래어가 다시 들어와 사용되고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은 바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쓰레기봉투’를 줄여 이르는 새말이었다. ‘생일선물’을 ‘생선’으로 ‘생일파티’는 ‘생파’로 줄이는 등, 빠른 소통을 위해 가능하면 줄여 쓰는 젊은이들의 언어 습관이 새롭게 ‘쓰봉’을 탄생시킨 거였다.

이쯤 되니 재미난 상상이 떠올랐다. 위의 시에서 어머니가 손주들에게 ‘쓰봉 속 십만 원’ 얘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손주들은 안방에 벗어놓은 할머니 바지를 뒤지는 대신 부엌에서 쓰레기봉투를 뒤집어 보며 할머니가 두고 가신 돈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말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세대 간 언어 차이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또한 줄임말은 언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게 하고, 그 말을 아는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등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줄여 쓰기를 통해 무분별하게 만들어내는 새말은 세대 간 불통을 부추길 수도 있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8346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4901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199806
3388 터키말과 튀르크어파 바람의종 2007.11.08 6287
3387 과대포장 바람의종 2007.11.08 6687
3386 싸우다와 다투다 바람의종 2007.11.09 6711
3385 운율 바람의종 2007.11.09 7960
3384 훈훈하다 바람의종 2007.11.09 12978
3383 몽골말과 몽골어파 바람의종 2007.11.10 9439
3382 다방구 바람의종 2007.12.12 8788
3381 우리와 저희 바람의종 2007.12.12 8230
3380 부추? 바람의종 2007.12.13 6054
3379 뒷담화 바람의종 2007.12.13 6917
3378 말과 나라 바람의종 2007.12.14 6578
3377 꿍치다 바람의종 2007.12.14 9153
3376 옮김과 뒤침 바람의종 2007.12.15 7934
3375 다슬기 바람의종 2007.12.15 8590
3374 새말의 정착 바람의종 2007.12.16 7261
3373 토족말 지킴이 챙고츠 바람의종 2007.12.16 6716
3372 궁시렁궁시렁 바람의종 2007.12.17 6849
3371 가시버시 바람의종 2007.12.17 7251
3370 고구마 바람의종 2007.12.18 8603
3369 도우미 바람의종 2007.12.18 8028
3368 만주말 지킴이 스쥔광 바람의종 2007.12.20 7248
3367 개구지다 바람의종 2007.12.20 836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