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16 09:55

쓰봉

조회 수 117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쓰봉

권대웅의 시 ‘쓰봉 속 십만 원’은 ‘벗어놓은 쓰봉 속주머니에 십만 원이 있다’로 시작한다.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된 노모가 집에 두고 온 당신의 전 재산을 자식들이 모르고 지나칠까 봐 일러주는 말이다.

‘쓰봉’은 바지를 뜻하는 일본말로 일제 시대에 들어와 1970년대까지 널리 쓰였다. 국어순화 운동에 힘입어 ‘와리바시(나무젓가락), 벤또(도시락), 다마네기(양파)’ 등과 함께 이제는 우리말에서 사라져버린 말이다. 중장년 세대는 대부분 알고 있는 말이지만 젊은이들에게 ‘쓰봉’은 낯선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젊은 주부들이 ‘쓰봉’이란 말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말이, 그것도 어렵게 쫓아낸 일본어 외래어가 다시 들어와 사용되고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은 바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쓰레기봉투’를 줄여 이르는 새말이었다. ‘생일선물’을 ‘생선’으로 ‘생일파티’는 ‘생파’로 줄이는 등, 빠른 소통을 위해 가능하면 줄여 쓰는 젊은이들의 언어 습관이 새롭게 ‘쓰봉’을 탄생시킨 거였다.

이쯤 되니 재미난 상상이 떠올랐다. 위의 시에서 어머니가 손주들에게 ‘쓰봉 속 십만 원’ 얘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손주들은 안방에 벗어놓은 할머니 바지를 뒤지는 대신 부엌에서 쓰레기봉투를 뒤집어 보며 할머니가 두고 가신 돈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말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세대 간 언어 차이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또한 줄임말은 언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게 하고, 그 말을 아는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등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줄여 쓰기를 통해 무분별하게 만들어내는 새말은 세대 간 불통을 부추길 수도 있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1. ∥…………………………………………………………………… 목록

    Date2006.09.16 By바람의종 Views52871
    read more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Date2007.02.18 By바람의종 Views199435
    read more
  3.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Date2006.09.09 By風磬 Views214407
    read more
  4. 시간에 쫓기다, 차별금지법과 말

    Date2022.09.05 By風文 Views1226
    Read More
  5. 역사와 욕망

    Date2022.02.11 By風文 Views1229
    Read More
  6. 말의 세대 차

    Date2023.02.01 By風文 Views1230
    Read More
  7. 영어의 힘

    Date2022.05.12 By風文 Views1231
    Read More
  8. 왜 벌써 절망합니까 - 벤처대부는 나의 소망

    Date2022.05.26 By風文 Views1232
    Read More
  9. 상석

    Date2023.12.05 By風文 Views1235
    Read More
  10. 말의 이중성, 하나 마나 한 말

    Date2022.07.25 By風文 Views1237
    Read More
  11. 뒤죽박죽, 말썽꾼, 턱스크

    Date2022.08.23 By風文 Views1239
    Read More
  12. 발음의 변화, 망언과 대응

    Date2022.02.24 By風文 Views1242
    Read More
  13. 마그나 카르타

    Date2022.05.10 By風文 Views1245
    Read More
  14. 장녀, 외딸, 고명딸

    Date2023.12.21 By風文 Views1245
    Read More
  15. 인종 구분

    Date2022.05.09 By風文 Views1247
    Read More
  16. 영어 열등감, 몸에 닿는 단위

    Date2022.04.27 By風文 Views1248
    Read More
  17. 가짜와 인공

    Date2023.12.18 By風文 Views1248
    Read More
  18. 더(the) 한국말

    Date2021.12.01 By風文 Views1249
    Read More
  19. 말과 절제, 방향과 방위

    Date2022.07.06 By風文 Views1249
    Read More
  20. 그림과 말, 어이, 택배!

    Date2022.09.16 By風文 Views1251
    Read More
  21. 왠지/웬일, 어떻게/어떡해

    Date2023.06.30 By風文 Views1252
    Read More
  22. 성인의 외국어 학습, 촌철살인

    Date2022.06.19 By風文 Views1254
    Read More
  23. 아주버님, 처남댁

    Date2024.01.02 By風文 Views1254
    Read More
  24. 국어와 국립국어원 / 왜

    Date2022.08.29 By風文 Views1255
    Read More
  25. 다만, 다만, 다만, 뒷담화

    Date2022.09.07 By風文 Views1259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