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4.14 06:29

어쩌다 보니

조회 수 149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사람들이 묻더라.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냐고. 뭔가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이유를 기대하면서. 이를테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거나(풉), 공부에 필요한 끈기를 타고났다거나(우웩) 하는 거 말이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식으로 미래를 쫀쫀하게 설계하며 사는 건 거짓말이거나 자기애가 강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닐까.

중3 때 금오공고를 가려고 했다.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으로 세운 학교라 학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면제였다. 거길 갔다면 노숙한 기능공으로 살고 있겠지(그것도 괜찮았겠다). 담임이 피식 웃으며 일반고를 가랬다. 갔다. 대학도 그랬다. 적당히 국어 선생이나 하며 살려고(미안, 국어 선생님들) 국문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담임은 무심히 허락을 해줬다(상담 없이!). 어쩌다 보니 대학원에 갔다. 졸업하자마자 몇년을 직장생활을 했다. 어찌저찌하여 다시 선생을 했다. 나도 배운 적 없는 글쓰기를 허덕대며 가르치고 있다(미안, 학생들). 매주 이 칼럼을 쓰는 것도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일.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게 아주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싫지만은 않아서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 힘으로 돌파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삶의 우연성과 복잡성을 깨닫기란 발가락으로 귀를 파는 일보다 어렵다. 운명은 타인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조응으로 이루어지나니, 지금 내 모습이 어찌 나의 것이겠는가. ‘현실’을 받아들이되 얽매이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만났던 타인의 음성을 다시 듣고 싶다면, ‘어쩌다 보니’라는 말을 내뱉어보시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283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9356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4334
3128 괄호, 소리 없는, 반격의 꿔바로우 風文 2022.08.03 1508
3127 할 말과 못할 말 風文 2022.01.07 1511
3126 후텁지근한 風文 2023.11.15 1515
3125 너무 風文 2023.04.24 1516
3124 '넓다'와 '밟다' 風文 2023.12.06 1516
3123 정치의 유목화 風文 2022.01.29 1517
3122 표준말의 기강, 의미와 신뢰 風文 2022.06.30 1518
3121 울타리 표현, 끝없는 말 風文 2022.09.23 1518
3120 지명의 의의 風文 2021.11.15 1521
3119 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風文 2023.01.09 1522
3118 ‘~면서’, 정치와 은유(1): 전쟁 風文 2022.10.12 1523
3117 단골 風文 2023.05.22 1524
3116 언어적 자해 風文 2022.02.06 1527
3115 한자를 몰라도 風文 2022.01.09 1529
3114 비는 오는 게 맞나, 현타 風文 2022.08.02 1529
3113 웃어른/ 윗집/ 위층 風文 2024.03.26 1532
3112 아이 위시 아파트 風文 2023.05.28 1534
3111 인기척, 허하다 風文 2022.08.17 1535
3110 한국어의 위상 風文 2022.05.11 1537
3109 기림비 2 / 오른쪽 風文 2020.06.02 1538
3108 독불장군, 만인의 ‘씨’ 風文 2022.11.10 1538
3107 맞춤법을 없애자, 맞춤법을 없애자 2 風文 2022.09.09 154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