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12.26 07:23

○○노조

조회 수 135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노조

굳은살은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말이 굳으면 대상을 별생각 없이 일정한 이미지로 자동 해석하게 한다. 한국 사회의 반노동 반노조 정서는 말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노조’라는 단어를 읊조려 보라.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나? ‘머리띠, 구호, 삭발, 파업’이 아닌, ‘친구, 맞잡은 손, 비를 피할 큰 우산’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노조’의 빈자리를 채우는 말을 떠올려 보라. 예전엔 ‘어용노조, 민주노조’ 정도였다면, 지금은 ‘강성노조, 귀족노조’라는 말이 떠오른다. 최근엔 ‘부패노조’라는 표현도 등장. 진실을 감추고 선입견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말들이다.

‘귀족노조’라는 말은 의미가 이중적인 만큼 효과가 좋다. 이 말은 월급과 복지가 좋은 일부 대기업 노조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노조 전체를 특권층으로 싸잡아 매도할 수도 있다(영어의 ‘노동 귀족’(labor aristocracy)이란 말은 특권화되고 보수화된 노조 간부를 뜻한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려도 노조가 있으면 무조건 ‘귀족노조’다. 노조를 꿈도 못 꾸는 노동자들에겐 노조 자체가 부러움과 상실감의 대상이다.

말은 투쟁만큼 중요하다. 정부와 언론의 악의적 선동이 넘치지만, 우리도 새로운 말을 발명해야 한다. 마치 칫솔처럼, 손난로처럼, 이불처럼 가깝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수식어를 찾아내어 꾸준히 써야 한다. 그러니, 송년 모임에 가는 차 안에서라도 ‘노조’의 꾸밈말로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해 봄이 어떨까. 나는 아직까진 문장 하나만 생각날 뿐. ‘노조는 부패한 게 아니라 부족한 것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2050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8629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3590
3238 우리와 외국인, 글자 즐기기 風文 2022.06.17 1311
3237 주현씨가 말했다 風文 2023.11.21 1311
3236 대통령과 책방 風文 2023.05.12 1312
3235 자막의 질주, 당선자 대 당선인 風文 2022.10.17 1313
3234 귀 잡수시다? 風文 2023.11.11 1316
3233 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風文 2023.11.14 1317
3232 자백과 고백 風文 2022.01.12 1318
3231 적과의 동침, 어미 천국 風文 2022.07.31 1321
3230 말의 평가절하 관리자 2022.01.31 1322
3229 식욕은 당기고, 얼굴은 땅기는 風文 2024.01.04 1322
3228 어떻게 토론할까, 질문 안 할 책임 風文 2022.07.24 1323
3227 새말과 소통, 국어공부 성찰 風文 2022.02.13 1325
3226 선정-지정 / 얼룩빼기 황소 風文 2020.05.15 1326
3225 언어적 적폐 風文 2022.02.08 1326
3224 돼지의 울음소리, 말 같지 않은 소리 風文 2022.07.20 1327
3223 태극 전사들 風文 2022.01.29 1330
3222 있다가, 이따가 風文 2024.01.03 1330
3221 말로 하는 정치 風文 2022.01.21 1331
3220 정치와 은유(2, 3) 風文 2022.10.13 1333
3219 말의 적 / 화무십일홍 風文 2023.10.09 1335
3218 ‘이고세’와 ‘푸르지오’ 風文 2023.12.30 1340
3217 세로드립 風文 2021.10.15 134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