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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꽃들아, 미안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부디 잘 가라”

 


‘삼가 고인들게 명복을 빕니다. 지금 가는 길 부디 행복하세요. 죄송합니다.’

노파는 포스트잇을 벽에 붙였다. “할머니, 그렇게 뭐라도 적어 붙이면 마음이 어떠세요?” “잉, 편안혀. 잘 가라는 말이라도 하니 맴이 편안혀, 에휴.”

이태원 10·29 참사 현장, 사람들은 말없이 서성인다. 말을 하는 건 벽에 붙은 포스트잇. 사람들은 포스트잇이 하는 말을 듣는다. ‘친구들아, 언니야, 오빠야, 동생아, 자식들아, 꽃들아’ 이름을 부르며, ‘미안하다, 죄송하다, 괴롭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부디 잘 가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죄책감, 무력감, 우울감, 분노가 뒤엉킨 말들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을 쌓고 있었다. 기어코 이어붙이고 있었다. 옆으로 앞뒤로 위아래로, 같은 말을 겹겹이 쌓아나가고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상투적인 말일지라도 꾸역꾸역 적었다. 명령과 지침과 해명과 그럴듯한 논리로 무장한 권력자들에 비하면, 헛되고 부질없는 말들. 이 무력한 말들로 뭘 하려고. 얕은 바람에도 떨어져 나뒹구는 이 말들로 뭘 하려고.

어리석은 우리는 매번 사회적 참사(죽음들)를 맞닥뜨리고 나서야 권력자들이 구사하는 ‘통치’의 민낯을 본다. 치밀하되 졸렬하고, 뻣뻣하되 두려움에 싸인. 사람을 타락시키는 건 두려움이다. 권력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아웅산 수치). 두려움에 싸여 타락하고 있는 권력 앞에 사람들은 ‘통치되지 않는 말’을 쌓고 있었다. 무심히 흩날리는 포스트잇에서 ‘통치될 수 없는 것들’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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