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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의 언어학

공평하고 올바름. ‘불공정하다’는 말만 꺼내도 긴장하게 되는 도덕적 당위. ‘선발’에만 선택적으로 사용해서 문제. 격차, 기회, 교육, 행복과 같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주제에는 잘 안 쓴다.

경비를 전액 지원하는 해외연수생을 모집한다면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뽑겠는가? 토익토플 점수? 학교 성적? 자기소개서? 가정 형편? 나의 은사님은 두 가지 기준으로 뽑았다. 첫째, 영어를 못할 것. 둘째, 외국 여행 경험이 없을 것. 영어를 잘하던 학생들 모두 낙방. 외국에 한 번도 못 가 본 학생이야말로 외국을 경험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기준. 불공정해 보이는가? 누구에겐 불공정, 누구에겐 공정.

말의 의미는 우연한 탈주를 꿈꾼다. 낱말 ‘먹다’를 아무리 째려본들 ‘마음먹다, 나이 먹다, 욕먹다’라는 표현이 가능한 이유를 못 찾는다. 식물 ‘꽃’만 고집하다가는 ‘눈꽃, 불꽃, 소금꽃, 열꽃, 웃음꽃, 이야기꽃’이 만들어내는 꽃다움의 확장을 어찌 만나리. 두 낱말의 우연한 조응과 부딪침만이 변화의 동력이다. 의미 탈주의 가능성은 개체가 갖고 있는 본질에서 나오지 않는다. 행여 본질이 있다면 그 본질을 부수고 타넘는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쓰는 ‘공정’이라는 말은 지극히 뻣뻣하고 날이 서 있다. 말 공부하는 입장에서 공정은 ‘움직이고 전진하는’ 공정이다. 공정의 불가능성 앞에 겸손해지고 끝없는 파격으로 공정의 가능성을 실험해야 한다. 뽑힌 사람만이 아니라, 떨어진 사람을 위한 공정, 떨어질 기회조차 없는 사람을 위한 공정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공정함이 연민과 함께 가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청탁

달포 전에 후배가 찾아왔다. 별다른 교류가 없었는데 대뜸 보자고 한다. 약속을 하고 나니 궁금해져서 문자로 물어보았다. ‘근데, 왜 보자는 거죠?’, ‘청탁할 일이 있어서…’ 홍보 쪽 일을 하고 있으니 ‘드디어’ 나를 모델로 쓰려고 하나? 상상이 맹랑하다.

그가 꺼낸 이름은 ‘이석기’. “이 코너는 말이나 글에 대해서 쓰는 건데 그런 정치적인 주제를 다룰 수 있을까?” 하며 발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한마디는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그도 말 때문에 갇혔잖아요. 오직 말 때문에.”

맞다. 돈이나 칼이 아닌, 오직 말 때문에 갇혀 있다. 8년째다. 어느 강연회에서 한 발언 녹취록을 유일한 증거로 삼아 국회의원인 그를 내란선동죄로 감옥에 잡아넣었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자주, 민주, 통일’이란 말은 안전하지 않다. 왜?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니까. 이런 입방아에 오르지 않으려고 입을 닫아버린다. 하지만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비상사태’를 포함해서 어떤 경우에도 사상, 양심, 종교, 표현의 자유는 제한할 수 없다. ‘국가 안보’라는 이유로 입을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 누구든 ‘국가’를 향해 어떠한 비판과 모욕적인 언사도 날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가입해 있는 국제 인권규약의 명령이다.

학살자 전두환도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몰아 감옥에 가두었다가 2년6개월 만에 석방했다. 이석기의 출소일은 2023년 5월3일. 다 채운다면, 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다음 정부까지 3대에 걸친 수감이다. 가혹하다. 광복절엔 석방하라. 말을 풀어주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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