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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아닌 글자

어릴 때 한자 중에 ‘용’(龍)자가 제일 멋졌다. 꼬리 쪽 획을 삐쳐 올려 쓰면 용이 꼬리를 튕기며 솟아오를 것 같았다. ‘부모 성명을 한자로 못 쓰면 상놈’이라는 소문에 아버지 이름에 있는 ‘목숨 수’(壽)자를 기억하려고 위에서 아래로 ‘사일공일구촌’(士一工一口寸)을 외웠다. 글자 하나가 이리 복잡한 걸 보니 목숨은 만만찮은가 보다 했다.

소리글자인 한글을 쓰다 보니 우리는 글이 말을 받아 적는 거라는 생각이 강하다. 하지만 글은 말의 졸개가 아니다. 글/자는 소리로 바꿀 수 없는 고유한 ‘문자성’이 있다. 글 자체는 시각적이다. 목소리를 가다듬듯이 글도 잘 읽히도록 공간적으로 ‘편집’된다. 서체를 비롯하여 들여쓰기, 문단 구분, 줄 간격, 쉼표, 마침표, 따옴표, 느낌표, 물음표, 말줄임표, 괄호와 같은 고유의 소통 장치를 쓴다.

시에도 글이 하나의 그림이 되는 구체시가 있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는 비가 내리듯, 에펠탑 앞에 선 듯, 애인의 초상화를 감상하는 듯하다. 황지우의 시 ‘무등’도 정삼각형 안에 시어를 배열하여 산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글자가 갖는 고유성을 활용한 예술과 디자인이 꽃을 피우고 있다.

다른 얘기지만, 학생들에게 야들야들한 명조 계열의 서체로 과제를 하라 해도, 열에 예닐곱은 울뚝불뚝한 고딕 계열을 고집한다.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기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취향의 표명이었다. 둘러보면 어디든 고딕체가 우위이다. 종이 매체가 아닌 온라인 매체에 쓰이는 글자는 고딕 계열이 압도적이다. 맥도날드의 방탄소년단 티셔츠에 새겨진 ‘ㅂㅌㅅㄴㄷ’도 고딕체다.


거짓말

거짓말의 기준 세 가지. 사실이 아닐 것. 자신이 믿는 것과 하는 말이 정반대임을 알고 있을 것. 상대방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을 것. 이 중에서 한두 가지가 빠지면 착각이거나, 실수, 기억의 오류, 아니면 농담이나 과장이다. 속이려는 목적과 수법에 따라 위로의 거짓말, 달콤한 거짓말, 면피용 거짓말, 추악하고 악의적인 거짓말 따위가 있으려나.

좋게 보면 거짓말은 상상력이다. 누구나 하루에 200번 정도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나처럼 과묵한(!) 사람이라면 두 마디 중 한 마디는 거짓말인 셈이다. 거짓말을 피할 길이 없다. 모든 언어에 ‘만약’이라는 가정법이 있고, 그 가정이 과거(‘중대재해처벌법이 제대로 만들어졌더라면’), 현재(‘만약 우리에게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미래(‘만약 손실보상금을 준다면’)를 넘나드는 걸로 봐서, 거짓말은 상상력의 열매다.

다행히 거짓말은 상호적이다. 말 자체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한 손으로는 손뼉을 못 치듯, 동의하고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있어야 완성된다. 그 동의는 대부분 듣는 사람 속에 있는 크고 작은 욕망 때문이다. 채우고 싶은 무엇, 사리사욕, 심신의 안위, 명예와 권력의 획득, 인정 욕구, 또는 현실 극복 의지일 수도 있다.

요사이 절실히 느껴지는 건 이런 거다.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이는데, 당사자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걸 아는지, 아니면 그의 굳건한 신념인지 당최 모르겠다는 거다. 마음속에 두 갈래의 말이 있을까? 갈라진 목소리가 없다면 그는 무오류의 언어를 가진 거다. 이런 사람은 사기꾼보다 무섭지만, 10원짜리 한 장보다 가볍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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