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25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이, 택배!

‘하나를 알면 백을 안다.’ 사람은 일부분만 보고 전체를 넘겨짚는 습성이 있다. 애당초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란 글렀다.

사람을 만나면 주로 얼굴을 본다. 다 보지 않고 눈을 본다. 관자놀이나 뒤통수, 귓바퀴는 잘 안 본다. 큰 점이 하나 있으면 그걸 곁눈으로 본다(점박이). 머리 모양이 특이하면 그걸 기억한다(노랑머리). 옷이나 장신구가 색다르면 그걸로 기억한다(‘저 반바지가 막말을 했어’). 행동 하나만 보고 인품을 평가한다. 젓가락질이 서투르면 ‘저런 것도 못하다니 볼 장 다 봤다’며 내친다. 예절이라는 게 타인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발달된 건지도 모른다.

말에도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는 일이 흔하다. ‘밥’이 모든 음식을 대신한다거나(‘밥 먹자!’), 가수명이 노래를 대신한다거나(‘요즘 방탄소년단만 들어’), 물건이 사람을 대신하기도 한다(‘버스 파업’).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일 때가 많다. ‘여기요, 저기요, 아저씨, 아줌마, 언니, 이봐요, 사장님, 선생님, 어르신’. 며칠 전 택배노동자들이 택배 차량의 아파트 지상도로 출입금지를 풀어달라며 기자회견을 했다. 아파트 주민이 이들을 향해 시끄럽다며 ‘어이, 택배!’라고 불렀다. 전에도 ‘때밀이, 배달, 노가다’처럼 일이 사람을 대신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나 쓴다. 사람이 있다면 ‘○○ 아저씨, ○○ 아줌마’처럼 호칭을 붙인다.

호명은 누군가를 불러 세운다는 점에서 소통의 출발점이자 상대에 대한 규정이다. 그 짧은 호명 안에 당신의 품격이 담긴다.


그림과 말

하와이 마노아계곡에 낮게 깔린 무지개. 이 형태의 무지개는 ‘우아코코’라고 불린다. 무지개를 뜻하는 하와이 말은 ‘아누에누에’이지만 낮게 깔린 무지개, 쌍 무지개, 곧추선 무지개, 원형 무지개 등 다양한 형태의 무지개를 가리키는 단어와 문구가 20여가지나 된다. - 미 기상학회지

말을 배우기 전 아이는 세계를 그림 비슷하게 받아들인다. 이름 없는 세계를 그림(이미지)으로 받아들인다. 쪼개고 베어내어 이름 붙이지 않는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먹여주고 씻겨주다니 이 세계는 믿을 만하다. ‘빨주노초파남보’를 모른 채 보는 무지개는 얼마나 온전하고 아름다운가. 희로애락의 감정은 추상적이지 않고 몸으로 체험되고 기억 속에 각인된다. 머릿속 그림은 살아 움직이며 꿈틀거린다. 구체의 세계, 육감의 세계이다.

말은 세계를 베어내는 칼이다. 세계를 그림처럼 아로새기고 있던 아이를 습격한다. 말은 개체가 갖는 단독성과 관계성을 없애고 공통점을 찾아 추상화한다. ‘나무, 괴롭다, 동물’이란 말은 추상적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껴보기도 전에 꽃이 아름답다는 말을 먼저 배운’ 사람에게, 그 말은 ‘꽃의 아름다움을 꺾는다’(<최초의 습격>, 고은강). 사람들이 글보다 이미지나 동영상에 환호하는 것도 달리 보면 어릴 적 본능을 회복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미지는 세계를 인식하는 가장 원초적인 도구이니까.

그런데 그림이든 말이든 이 세계를 무심히 그려내지는 못한다. 차별한다. 이 세계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 먼 곳보다는 가까운 곳에 더 눈길을 준다. ‘나’와 ‘나 아닌 자’, ‘지금’과 ‘지금 아닌 때’, ‘여기’와 ‘여기 아닌 곳’을 기준으로 구별한다. 물리적 거리는 마음속 거리감으로 바뀌어 친한 사람은 가깝고 모르는 사람은 멀다. 도덕, 즉 옳고 그름의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가까움’은 옳고, ‘멂’은 그르다. 이 구별 본능을 피할 수 없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3297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9878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4849
3238 직거래하는 냄새, 은유 가라앉히기 風文 2022.08.06 1367
3237 고백하는 국가, 말하기의 순서 風文 2022.08.05 1234
3236 올해엔 저지른다, ‘죄송하지만’ 風文 2022.08.04 1181
3235 괄호, 소리 없는, 반격의 꿔바로우 風文 2022.08.03 1522
3234 비는 오는 게 맞나, 현타 風文 2022.08.02 1542
3233 적과의 동침, 어미 천국 風文 2022.07.31 1384
3232 노랗다와 달다, 없다 風文 2022.07.29 1471
3231 애정하다, 예쁜 말은 없다 風文 2022.07.28 1273
3230 공공언어의 주인, 언어학자는 빠져! 風文 2022.07.27 1320
3229 날아다니는 돼지, 한글날 몽상 風文 2022.07.26 1196
3228 말의 이중성, 하나 마나 한 말 風文 2022.07.25 1266
3227 어떻게 토론할까, 질문 안 할 책임 風文 2022.07.24 1362
3226 일본이 한글 통일?, 타인을 중심에 風文 2022.07.22 1308
3225 3인칭은 없다, 문자와 일본정신 風文 2022.07.21 1299
3224 돼지의 울음소리, 말 같지 않은 소리 風文 2022.07.20 1369
3223 말끝이 당신이다, 고급 말싸움법 風文 2022.07.19 1349
3222 1도 없다, 황교안의 거짓말? 風文 2022.07.17 1426
3221 ‘짝퉁’ 시인 되기, ‘짝퉁’ 철학자 되기 風文 2022.07.16 1232
3220 형용모순, 언어의 퇴보 風文 2022.07.14 1494
3219 사람, 동물, 언어 / 언어와 인권 風文 2022.07.13 1200
3218 노동과 근로, 유행어와 신조어 風文 2022.07.12 1218
3217 교열의 힘, 말과 시대상 風文 2022.07.11 129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