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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강사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인강)에서 제일 잘나가는 ‘1등 스타강사’. ‘1번 타자’가 갖는 공격성을 부여한다. 학원 홈페이지, 버스나 전철 광고 맨 앞자리에 사진과 함께 이름을 올린다. 이 반열에 오르면 아이돌급의 수입과 인기를 누린다. 일타강사는 가르칠 내용을 찰지게 요리하는 건 기본이고, 판서, 외모, 입담(말발)도 빼어난 만능 엔터테이너이다. 승자독식의 법칙이 철저히 작동해서 경쟁이 치열하다.

진정한 배움은 선생을 흉내 내는 데에서 시작한다. 말을 배울 때에도 그랬고, 헤엄치기, 젓가락질을 배울 때에도 그랬다. ‘배움’이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무엇을 가르쳐 줄지 알 수 없는 사람 밑에서,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는 이상한 구조를 갖는다(우치다 다쓰루). 그래서 배움은 기능을 미리 알고 사는 상품 구매와 다르다. 깨달음을 향한 기다림이자 투신이다. 스스로 물에 뜨는 순간이 올 때까지 잠자코 선생의 자세를 흉내 내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은 노예에 가깝다. 의존적이고 무기력하다. 같은 걸 가르쳐도 배우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동시성과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는 말(줄탁동시, 교학상장)이 있지만, 아무래도 교육은 학생이 주인이다. ‘배움’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가르침’은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일타강사를 찾는 열정만큼이나 ‘누가’ ‘무엇 때문에’ 배우는지도 물어야 한다. 하물며 지금의 교육이 배움을 배반하고 있다면, 선생이 아니라 학생한테 눈을 돌려야 한다.



‘일’의 의미

단어는 고립되어 쓰이지 않는다. 단어는 한 사회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배적 신화에 기대어 산다. 이를테면 다음 두 목록에 함께 쓰인 ‘일’과 ‘돈’이 각각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생각해보자.

1) ㄱ. 집, 먼지, 창고, 냄비, 일
ㄴ. 임금, 출퇴근, 노조, 노무관리, 일
2) ㄱ. 음식, 옷, 차, 집, 돈
ㄴ. 이율, 은행, 주식, 투자, 돈

(1ㄱ)의 ‘일’은 몸과 직접 관계가 있다. 쓸고 닦고 고쳐야 하는 몸의 구체적인 움직임과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1ㄴ)의 ‘일’은 매매되는 노동이다. 돈으로 환산되고, 정해진 규약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2ㄱ)의 ‘돈’은 사는 데 필요한 것을 교환할 수 있는 것이지만, (2ㄴ)의 ‘돈’은 그 자체를 축적하거나 스스로 이윤을 창출하는 추상적인 존재다. 수치의 등락 자체가 전부다.

‘일’과 ‘돈’에 대한 지배적 신화는 (1ㄴ, 2ㄴ)의 맥락에서 일어난다. 몸놀림이나 사람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탈피해 있다. ‘일’은 수량화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이 돈을 번다’. 그러니 가만히 놔두지 말고 굴리고 투자해야 한다.

‘다행히(!)’ 지구적 위기 상황은 우리에게 ‘일’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평소라면 임금, 초과이윤율, 사회적 평판을 기준으로 구분했을 거다. 지금은 어떤 노동이 사회의 유지와 존속에 필수적인지를 묻는다. 보건의료와 돌봄노동 종사자, 배달업 노동자, 청소·경비 노동자, 그리고 농민. 이러한 ‘필수노동’에 대한 논의와 함께 ‘도대체 내 손과 발로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뭔가’도 묻게 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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