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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의 울음소리

“아빠도 돼지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야 했어!”

스무살 딸은 갑자기 펑펑 울었다. 새벽, 어느 도시에 있는 소와 돼지 도살장을 다녀온 날 밤이었다. 종일 트럭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돼지들에게 마실 물을 준 게 다였단다. 진실을 보았고, 그는 울었다.

늘 그렇지만, 육식과 관련해서도 언어는 진실을 가리는 가면이었다. 도시인은 ‘먹을 때’에만 동물과 접촉한다. 다만 ‘살아 있던 동물을 죽이고 절단하여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는 진실은 지우고 ‘고기’라는 경쾌한 이름의 음식을 먹을 뿐이다. 언어만 바꾸면 ‘살아 있던 동물’은 사라진다. ‘등심’이나 ‘육회’란 말만으로도 살아 있던 소는 사라진다.

하지만 인간은 ‘숨통을 끊는 타격, 20초 안에 피를 다 빼내야 하는 방혈, 머리와 다리를 자르는 두족절단, 가죽을 벗기는 박피, 내장 적출, 몸통을 두 조각 내는 이분도축, 소독·세척’이라는 일곱 단계를 거쳐 소를 살해한다. 별도의 가공작업을 거쳐 ‘등심, 안심, 채끝, 제비추리, 양지, 사태, 안창살, 갈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죽음을 분리·포장한다.

채식주의자들은 이런 육식문화가 인간끼리 벌이는 착취의 역사와 닮았다고 본다. 인간은 살아 있던 동물에 대한 살해와 절단 과정을 ‘고기’라는 이름으로 은폐해왔다.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강제로 징집하여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수탈 행위의 도구로 전락시킨 과정을 ‘강제징용’이라고 부르지 않고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의 문제’라는 이름으로 은폐해왔다. 아베도 강제징용 피해자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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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같지 않은 소리

운명적 나이인 열다섯 살 아들은 랩에 몰두해 있다. 본인 인생과 음악의 궁합을 맞췄는지 세상, 특히 부모에 대한 저항정신이 항일투쟁만큼 매섭다. 그런데 그가 하는 랩을 흉내라도 내볼라치면 이내 좌절한다. 그의 혀는 현란하고 민첩한데, 내 혀는 느리기만 하다. 다연발 속사포로 1초에 열두 음절을 쏴대는데, 나는 왜 세 음절 내기도 벅차냔 말이다.

어른은 아이의 퇴화이다. 말소리만 봐도 그렇다. 세상 말소리는 1500개가 넘는다. 아이는 이 소리를 모두 낼 수 있다. 그러다 모어를 익힐 즈음엔 이 중에 10%도 안 남는다. 모어를 배운다는 건 90%의 소리를 내다 버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끔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본다. 아이 때 놀면서 냈던 ‘두구두구’ 헬리콥터 소리며, ‘부웅, 끼익’ 자동차 소리. 섬세하고 실감났다. 로켓은 ‘슈웅’ 지구 궤도를 지나 목성에 착륙했다. ‘야옹야옹’을 철자대로 발음한다면 반려묘 가족 자격 미달이다. 몸살에 시달릴 때 냈던 신음소리를 떠올려 보라. 글로는 ‘아아아’나 ‘으으음’ 정도일 텐데, 아픈 사람의 신음소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깊은 한숨을 쉬어보라. ‘후’나 ‘후유’로 온전히 담지 못한다. 더 놀라운 건 ‘스읍’이다. 보통 날숨으로 소리를 내는데, 이 소리는 들숨으로 낸다. 상대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멋쩍은 상황에서 내는 소리이다. 사전에도 없다.

낼 수 없을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순간, 그래서 언어 체계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바로 그 순간 말이 말다워지는 순간이다. 체계에서 배제된 요소가 실은 구겨진 채로 체계 안에 숨어 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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