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1.11.10 18:29

주어 없는 말

조회 수 125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주어 없는 말

주어가 없다는 말은 보통은 국어 선생님들이 해야 제격이다. 그러나 종종 정치권에서 주고받는 논쟁에는 주어가 없다는 둥 하면서 느닷없는 문법 논쟁이 일다가는 표연히 사라지곤 한다. 문법 상식으로는 당연히 모든 문장에는 주어가 있는 것이 옳게 느껴진다. 서술어는 있는데 그 움직임의 주체인 주어가 없다는 것은 세상의 순리가 아닌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이 세상의 이치를 그림 그리듯이, 또 사진 찍듯이 드러내지는 않는다. 언어 자체가 인습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그 형식에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숱한 언어적 법칙이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어서 언어논리적인 규칙만으로는 설명이 쉽지 않은 부분도 생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비가 온다’고 하면서 ‘비’라는 주어를 내세우는데 영어에서는 의아하게도 ‘it’이라는 가주어를 쓰기도 한다.

또 우리가 말을 하다 보면 주어나 목적어를 내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도둑이야!” 아니면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주어가 없는 탓에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할 사람은 없다. 어디냐고 되물으며 함께 뛰어가려 할 것이다.

언어를 해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만도 논리만도 아니다. 그것은 남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감수성이다. 종종 외국에 가서 짧은 외국어로 실컷 여행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의 언어 능력 덕분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맞이하는 그 현지인들의 감수성 덕이 더 크다. 정치인들이 주어가 없다고 둘러댈 때마다 그들의 정치적 좌표를 감수성을 가지고 들여다보라. 그들이 왜 주어가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 더욱더 큰 문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3803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0412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5409
3282 찧다 / 빻다 바람의종 2010.07.30 16590
3281 맞고요, 맞구요 風磬 2006.09.09 16583
3280 모리배 바람의종 2007.07.02 16577
3279 "못"의 띄어쓰기 바람의종 2009.03.25 16574
3278 고바위, 만땅, 후까시, 엥꼬, 빠꾸, 오라이, 기스 바람의종 2008.12.06 16511
3277 포클레인, 굴삭기 / 굴착기, 삽차 바람의종 2010.05.31 16492
3276 살아 진천 죽어 용인 바람의종 2008.01.15 16473
3275 조조할인 바람의종 2010.08.17 16358
3274 외래어 받침 표기법 바람의종 2012.05.07 16333
3273 안전성 / 안정성 바람의종 2012.09.24 16320
3272 단수 정리 바람의종 2007.10.17 16303
3271 쟁이와 장이 바람의종 2010.03.24 16298
3270 흉칙하다 바람의종 2009.02.02 16241
3269 차지다 , 찰지다 바람의종 2012.09.04 16198
3268 개차반 風磬 2006.09.14 16194
3267 흡연을 삼가 주십시오 바람의종 2008.03.08 16131
3266 팔염치, 파렴치 / 몰염치, 염치, 렴치 바람의종 2012.10.02 16084
3265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들 風磬 2006.09.07 16083
3264 겻불 風磬 2006.09.14 16082
3263 개개다(개기다) 風磬 2006.09.13 16078
3262 단도리 바람의종 2008.02.04 16073
3261 한풀 꺾이다 바람의종 2008.02.01 1605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