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11 19:23

피동형을 즐기라

조회 수 171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피동형을 즐기라

연구위원·경희대 교수‘원고가 마무리되셨는지요?’

오늘도 어떤 분에게 원고를 독촉하면서 피동형 문장을 썼다. ‘마무리하셨나요?’라 하면 지나치게 채근하는 듯하여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나도 매번 독촉 문자를 받는데 열이면 열 ‘언제쯤 원고가 완성될까요?’ 식이다. ‘원고 완성했어요?’라 하면 속이 상할 듯. 비겁한 피동 풍년일세.

한국어 문장에 대한 가장 강력하면서도 근거 없는 신화가 ‘피동형을 피하라’라는 것. 글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얘기를 한번쯤 들었을 것이다. ‘능동형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 ‘피동형은 우리말을 오염시킨다’, ‘우리말은 피동형보다 능동형 문장이 자연스럽다’, ‘피동형은 영어식 또는 일본어식 표현의 영향이다’.

‘능동형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철수가 유리창을 깼다’처럼 행위 주체가 주어 자리에 오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 점에서 능동형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한국어만 그런 게 아니라는 점에서 틀렸다. 모든 언어가 능동형이 피동형보다 자연스럽다.

문제는 말글살이라는 게 복잡하고 섬세한 사람살이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행위 주체를 명확히 밝히는 일이 무례해 보일 수도 있고 괜한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행위 주체를 모를 경우도 있다. 독자에게 익숙한 정보가 주체보다는 대상인 경우도 있고, 당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싶을 때도 있다. ‘해양생태계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게 ‘일본 정부가 해양생태계를 파괴했다’보다 더 슬플 수 있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진실을 감추기 위해 피동형을 쓰는 것까지 감싸고 싶지는 않다. 행위의 주체와 책임을 똑똑히 밝혀야 할 땐 결기 있게 능동형을 써야 한다. 한국어는 능동형도 피동형도 자연스럽다. 피동형을 즐기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64536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11111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25836
3392 터키말과 튀르크어파 바람의종 2007.11.08 6982
3391 과대포장 바람의종 2007.11.08 7152
3390 싸우다와 다투다 바람의종 2007.11.09 7152
3389 운율 바람의종 2007.11.09 8422
3388 훈훈하다 바람의종 2007.11.09 13845
3387 몽골말과 몽골어파 바람의종 2007.11.10 9861
3386 다방구 바람의종 2007.12.12 9136
3385 우리와 저희 바람의종 2007.12.12 8652
3384 부추? 바람의종 2007.12.13 6466
3383 뒷담화 바람의종 2007.12.13 7357
3382 말과 나라 바람의종 2007.12.14 6959
3381 꿍치다 바람의종 2007.12.14 9539
3380 옮김과 뒤침 바람의종 2007.12.15 8332
3379 다슬기 바람의종 2007.12.15 9004
3378 새말의 정착 바람의종 2007.12.16 7725
3377 토족말 지킴이 챙고츠 바람의종 2007.12.16 7407
3376 궁시렁궁시렁 바람의종 2007.12.17 7233
3375 가시버시 바람의종 2007.12.17 7842
3374 고구마 바람의종 2007.12.18 9023
3373 도우미 바람의종 2007.12.18 8402
3372 만주말 지킴이 스쥔광 바람의종 2007.12.20 7672
3371 개구지다 바람의종 2007.12.20 883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