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10 06:48

이중피동의 쓸모

조회 수 112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중피동의 쓸모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무성영화 시절 변사는 특유의 저 말투로 어떤 장면을 실감나게 강조했다. 저래야 영화의 맛이 살았다. 효과 만점. 모든 표현에는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다.

신화처럼 완고하게 전해오는 명령이 있다. ‘이중피동을 피하라!’ 한 번으로 족한데 두 번이나 피동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정말 그런가? 안 써도 되는데 굳이 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설명을 못 할 뿐이지 쓸모없는 게 아니다.

흥미롭게도 옛말에는 진정한 이중피동, 즉 피동접사를 겹쳐 쓰는 말이 꽤 있다. 예를 들면, ‘닫히이다, 막히이다, 잊히이다, 눌리이다, 밟히우다, 잡히우다’. ‘닫히다, 막히다, 잊히다’ 등은 오래전부터 피동사로 쓰였다. 시간이 흘러 이 말이 피동사인지 아닌지 흐릿해지니 ‘이’나 ‘우’를 붙여 피동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했다. 낡은 옷을 기워 입듯, 말도 닳아서 애초의 쓸모가 흐릿해지면 뭔가를 덧댄다. 피동사만으로는 피동의 의미를 나타내기엔 약해 보이니 ‘지다’를 덧붙였다. 장례를 치르는 자식이 육개장을 목으로 넘기며 “이런데도 밥이 먹혀지는군”이라고 할 수 있잖은가.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불가항력이랄까, 거리감의 강조랄까. 아니면, 변명의 장치랄까.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김춘수),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이용 ‘잊혀진 계절’). 익숙해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쉽게 쓰인 시, 잊어지지 않는 눈짓, 잊힌 계절’이면 참 어색하다.

사전이나 맞춤법 검사기의 구령에 맞춰 걷지 말자. 나의 감각을 맞춤하게 담을 수만 있다면 어떤 언어도 가능하다. 삶이 그렇듯.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205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8636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3590
3392 홍일점 바람의종 2007.10.05 10820
3391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바람의종 2010.08.14 11948
3390 홀아비바람꽃 바람의종 2008.05.25 8438
3389 홀씨 바람의종 2010.03.09 15331
3388 홀몸 바람의종 2007.04.27 9590
3387 혼저 옵소예 file 바람의종 2009.11.09 10346
3386 혼신을 쏟다 바람의종 2009.03.16 7778
3385 혼성어 風文 2022.05.18 1408
3384 혼동, 혼돈 바람의종 2010.05.05 13094
3383 혹성, 행성, 위성 바람의종 2010.07.21 11264
3382 호함지다 바람의종 2012.09.19 8625
3381 호프 바람의종 2011.11.21 13237
3380 호태왕비 바람의종 2008.02.17 9076
3379 호칭과 예절 바람의종 2009.03.03 8800
3378 호치키스 바람의종 2010.03.06 10108
3377 호우, 집중호우 / 큰비, 장대비 바람의종 2009.07.29 8398
3376 호언장담 風文 2022.05.09 1342
3375 호스테스 바람의종 2008.02.20 11487
3374 호송 / 후송 바람의종 2010.03.06 13674
3373 호분차 온나! file 바람의종 2010.03.26 12592
3372 호박고지 바람의종 2008.01.05 9218
3371 호르몬 바람의종 2009.09.27 750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