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12.26 07:23

○○노조

조회 수 96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노조

굳은살은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말이 굳으면 대상을 별생각 없이 일정한 이미지로 자동 해석하게 한다. 한국 사회의 반노동 반노조 정서는 말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노조’라는 단어를 읊조려 보라.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나? ‘머리띠, 구호, 삭발, 파업’이 아닌, ‘친구, 맞잡은 손, 비를 피할 큰 우산’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노조’의 빈자리를 채우는 말을 떠올려 보라. 예전엔 ‘어용노조, 민주노조’ 정도였다면, 지금은 ‘강성노조, 귀족노조’라는 말이 떠오른다. 최근엔 ‘부패노조’라는 표현도 등장. 진실을 감추고 선입견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말들이다.

‘귀족노조’라는 말은 의미가 이중적인 만큼 효과가 좋다. 이 말은 월급과 복지가 좋은 일부 대기업 노조를 지칭할 수도 있지만, 노조 전체를 특권층으로 싸잡아 매도할 수도 있다(영어의 ‘노동 귀족’(labor aristocracy)이란 말은 특권화되고 보수화된 노조 간부를 뜻한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려도 노조가 있으면 무조건 ‘귀족노조’다. 노조를 꿈도 못 꾸는 노동자들에겐 노조 자체가 부러움과 상실감의 대상이다.

말은 투쟁만큼 중요하다. 정부와 언론의 악의적 선동이 넘치지만, 우리도 새로운 말을 발명해야 한다. 마치 칫솔처럼, 손난로처럼, 이불처럼 가깝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수식어를 찾아내어 꾸준히 써야 한다. 그러니, 송년 모임에 가는 차 안에서라도 ‘노조’의 꾸밈말로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해 봄이 어떨까. 나는 아직까진 문장 하나만 생각날 뿐. ‘노조는 부패한 게 아니라 부족한 것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9502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6048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0935
3234 ‘가오’와 ‘간지’ 風文 2023.11.20 966
3233 날씨와 인사 風文 2022.05.23 967
3232 과잉 수정 風文 2022.05.23 969
3231 가족 호칭 혁신, 일본식 외래어 風文 2022.06.26 969
3230 비계획적 방출, 주접 댓글 風文 2022.09.08 969
3229 교열의 힘, 말과 시대상 風文 2022.07.11 970
3228 후텁지근한 風文 2023.11.15 970
3227 자백과 고백 風文 2022.01.12 971
3226 정치와 은유(2, 3) 風文 2022.10.13 972
3225 몸으로 재다, 윙크와 무시 風文 2022.11.09 974
3224 '밖에'의 띄어쓰기 風文 2023.11.22 976
3223 1도 없다, 황교안의 거짓말? 風文 2022.07.17 977
3222 “영수증 받으실게요” 風文 2024.01.16 977
3221 헷갈리는 맞춤법 風文 2024.01.09 978
3220 수능 국어영역 風文 2023.06.19 981
3219 아니오 / 아니요 風文 2023.10.08 982
3218 통속어 활용법 風文 2022.01.28 983
3217 “힘 빼”, 작은, 하찮은 風文 2022.10.26 986
3216 남과 북의 언어, 뉘앙스 차이 風文 2022.06.10 987
3215 다만, 다만, 다만, 뒷담화 風文 2022.09.07 987
3214 김 여사 風文 2023.05.31 987
3213 ‘거칠은 들판’ ‘낯설은 타향’ 風文 2024.01.09 98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