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1.09.07 22:59

편한 마음으로

조회 수 99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편한 마음으로

 어느 기관의 직원 모집에 무려 4500여명이 응시했다. 마침 어느 고위층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사람을 위해 전화로 부탁을 해주었는데, 1차 서류 전형에서 겨우 2299등을 한 그 인턴이 무리한 성적 조작의 반칙을 통해 최종 합격자 36명에 포함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합격되었던 응시자 셋이 떨어졌다고 한다.

 황당한 것은 이것을 수사한 검찰의 태도다. 전화로 ‘부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류 조작을 시킨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부탁한 사람은 빼고 성적을 조작한 사람들만 기소하는 모양이다. 그 까닭을 검찰은 그 고위층이 ‘그저 편한 마음으로 부탁한 것’이라고 둘러대어 주었다.

 한쪽이 편한 마음으로 부탁했는데, 부탁받는 상대방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들어주어야 하는 사안으로 받아들였다면 이것은 정상적인 소통이 아니다. 갑과 을의 균형이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부탁’이라는 언어행위는 상대방에게 결정권이 있는 경우에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전혀 그러한 힘이 없는 약자이면서 강자에게 그러한 ‘부탁’을 받았다면 그것은 부탁조의 협박이거나 명령이다. 조폭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요즘 바쁜가봐!”라는 말 한마디에 얼른 “죄송합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디 정상적인 인사와 답례인가? 권력과 굴종의 대칭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상징 아닌가?

언어는 형식적 규정만 잘 맞는다고 제대로 된 말이 아니다. 열린 사회에서 누구나 동등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소통을 위한 언어가 된다. 공정해야 할 공직사회에서 이렇게 ‘암흑가의 대화’ 같은 표현이 횡행하며 젊은이들의 취업 활동을 방해한 것은 분명히 권력 남용이자 공중의 이익을 거스른 짓이다. 그리고 검찰은 말의 뜻을 교묘하게 틀어버림으로써 더 중요한 자신의 의무를 포기했다. 법이 언어를 지키지 못하면 언어도 법을 지키지 못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2531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9066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4043
3106 소와리골 바람의종 2008.05.06 7134
3105 보도자료 바람의종 2008.05.06 4362
3104 푸석수염 바람의종 2008.05.08 7955
3103 쑥돌·감돌·몽돌 바람의종 2008.05.08 10875
3102 둥글레 바람의종 2008.05.10 7476
3101 은냇골 이야기 바람의종 2008.05.10 6622
3100 연설 바람의종 2008.05.11 6781
3099 사변 바람의종 2008.05.11 5968
3098 막덕·바리데기 바람의종 2008.05.12 8227
3097 갈대 바람의종 2008.05.12 6561
3096 사리원과 원효 바람의종 2008.05.13 7296
3095 군말 바람의종 2008.05.13 7363
3094 다듬은 말 바람의종 2008.05.22 5643
3093 대장금①/능금 바람의종 2008.05.22 8237
3092 짚신나물 바람의종 2008.05.23 7011
3091 수자리와 정지 바람의종 2008.05.23 8079
3090 에두르기 바람의종 2008.05.24 7014
3089 소행·애무 바람의종 2008.05.24 8901
3088 대장금②·신비 바람의종 2008.05.25 9429
3087 홀아비바람꽃 바람의종 2008.05.25 8449
3086 살피재 바람의종 2008.05.27 7996
3085 차별1 바람의종 2008.05.27 710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