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1.09.06 15:52

치욕의 언어

조회 수 82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치욕의 언어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내용으로는 일본 정부는 10억엔의 지원 기금을 제공하고, 한국 정부는 이를 ‘최종 해결’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런데 아직 주장이 엇갈리고는 있지만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소녀상을 이전하는 ‘조건’이 붙었다는 설왕설래가 있다. 무언가 이상하다. 피해자들에 대한 인격적 배려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무슨 사건 브로커들끼리의 합의서 같다.

언어는 늘 일정한 맥락 속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말투와 표정, 그리고 적절한 수사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도덕적인 책임을 표한다고 하면서, 10억엔으로 해결되었다는 둥,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이라는 둥 하는 것은 애당초 도덕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돈 몇 푼으로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고 모욕을 하는 행위에 가깝다.

 식민지 지배와 세계대전은 참혹한 상처를 역사에 남겼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인권에 대한 혹은 인도적 문제는 ‘인간의 가치’ 문제를 깊이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프랑스대혁명이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선언하고, 러시아혁명이 노동자들에게 자각을 가능하게 한 것처럼, 한국과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도덕적 계기를 만들어 냈어야 한다.

단순히 약하디약한 여성들의 개인적인 불행이나 고단한 숙명이 아니라 인간의 잔혹한 죄의 대가를 대신 짊어진 대속(代贖)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앞에서 돈 액수 혹은 재론을 금지한다거나 또 소녀상 이전 등과 같은 표현은 감히 꺼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그들이 이러한 역사적 대의를 담을 만한 그릇과 깜냥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이 합의는 치욕의 언어로 가득 찼다. 인간의 가치를 듬뿍 높이는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감동의 시기는 아직 멀었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9644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6258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1180
3212 김 여사 風文 2023.05.31 996
3211 새말과 소통, 국어공부 성찰 風文 2022.02.13 997
3210 ‘거칠은 들판’ ‘낯설은 타향’ 風文 2024.01.09 997
3209 난민과 탈북자 風文 2021.10.28 998
3208 ‘이’와 ‘히’ 風文 2023.05.26 998
3207 '바치다'와 '받치다' file 風文 2023.01.04 1001
3206 영어 공용어화 風文 2022.05.12 1002
3205 저리다 / 절이다 風文 2023.11.15 1003
3204 예민한 ‘분’ 風文 2023.05.29 1010
3203 우리와 외국인, 글자 즐기기 風文 2022.06.17 1013
3202 말끝이 당신이다, 고급 말싸움법 風文 2022.07.19 1014
3201 ‘건강한’ 페미니즘, 몸짓의 언어학 風文 2022.09.24 1014
3200 말의 미혹 風文 2021.10.30 1015
3199 말로 하는 정치 風文 2022.01.21 1015
3198 구경꾼의 말 風文 2022.12.19 1015
3197 분단 중독증, 잡것의 가치 風文 2022.06.09 1017
3196 일본이 한글 통일?, 타인을 중심에 風文 2022.07.22 1017
3195 본정통(本町通) 風文 2023.11.14 1017
3194 대통령과 책방 風文 2023.05.12 1018
3193 24시 / 지지지난 風文 2020.05.16 1020
3192 주현씨가 말했다 風文 2023.11.21 1024
3191 까치발 風文 2023.11.20 102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