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
큰사전에서 ‘억수’를 찾아보면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로 풀이돼 있다. 이러한 뜻의 ‘억수’는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비가 억수로 내리부었다’처럼 쓰인다. 우리말에는 이와 다른 뜻을 가진 ‘억수’가 있다.
“억수의 산목숨이 골짜기마다 그득그득 모두 제 몫을 하고 ….”(박경리 <토지>)
“저 고래 덕분에 오늘 고기가 억수겠어요. 어탐기를 좀 봐요!”(천금성 <허무의 바다>)
“동생들을 거느리고 산나물을 억수로 많이 해 온 적도 있었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억수로 퍼마셨는데도 도무지 취하지가 않는다 그런 말입니다.”(이동하 <도시의 늪>)
여기서 ‘억수’는 ‘세차게 내리는 비’의 뜻이 아니라 ‘아주 많은 수나 양’, 또는 ‘아주 심한 정도’의 뜻으로 쓰였다.
이런 뜻의 ‘억수(로)’를 경상도 방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억수의 산목숨’ 등에서 ‘억수’는 한자말 억수(億數)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한자 ‘억’(億)은 ‘억대, 억겁, 억만’ 등에서처럼 ‘오랜, 많은’의 뜻이 있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가리키는 ‘억수’와 표기는 같지만 그 뜻이 다르므로, 별도의 올림말로 올리거나 아니면 동음이의어로 다룰 수도 있을 터이다. ‘소리는 같으나 뜻이 다른 낱말’을 동음이의어라 하는데, 사전에서는 ‘철자’가 같고, 그 뜻과 어원이 다른 낱말들에 한해 ‘강¹’, ‘강²’처럼 어깨번호를 붙여 구별하고 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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