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22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돼지의 울음소리

“아빠도 돼지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야 했어!”

스무살 딸은 갑자기 펑펑 울었다. 새벽, 어느 도시에 있는 소와 돼지 도살장을 다녀온 날 밤이었다. 종일 트럭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돼지들에게 마실 물을 준 게 다였단다. 진실을 보았고, 그는 울었다.

늘 그렇지만, 육식과 관련해서도 언어는 진실을 가리는 가면이었다. 도시인은 ‘먹을 때’에만 동물과 접촉한다. 다만 ‘살아 있던 동물을 죽이고 절단하여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는 진실은 지우고 ‘고기’라는 경쾌한 이름의 음식을 먹을 뿐이다. 언어만 바꾸면 ‘살아 있던 동물’은 사라진다. ‘등심’이나 ‘육회’란 말만으로도 살아 있던 소는 사라진다.

하지만 인간은 ‘숨통을 끊는 타격, 20초 안에 피를 다 빼내야 하는 방혈, 머리와 다리를 자르는 두족절단, 가죽을 벗기는 박피, 내장 적출, 몸통을 두 조각 내는 이분도축, 소독·세척’이라는 일곱 단계를 거쳐 소를 살해한다. 별도의 가공작업을 거쳐 ‘등심, 안심, 채끝, 제비추리, 양지, 사태, 안창살, 갈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죽음을 분리·포장한다.

채식주의자들은 이런 육식문화가 인간끼리 벌이는 착취의 역사와 닮았다고 본다. 인간은 살아 있던 동물에 대한 살해와 절단 과정을 ‘고기’라는 이름으로 은폐해왔다.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강제로 징집하여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수탈 행위의 도구로 전락시킨 과정을 ‘강제징용’이라고 부르지 않고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의 문제’라는 이름으로 은폐해왔다. 아베도 강제징용 피해자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

말 같지 않은 소리

운명적 나이인 열다섯 살 아들은 랩에 몰두해 있다. 본인 인생과 음악의 궁합을 맞췄는지 세상, 특히 부모에 대한 저항정신이 항일투쟁만큼 매섭다. 그런데 그가 하는 랩을 흉내라도 내볼라치면 이내 좌절한다. 그의 혀는 현란하고 민첩한데, 내 혀는 느리기만 하다. 다연발 속사포로 1초에 열두 음절을 쏴대는데, 나는 왜 세 음절 내기도 벅차냔 말이다.

어른은 아이의 퇴화이다. 말소리만 봐도 그렇다. 세상 말소리는 1500개가 넘는다. 아이는 이 소리를 모두 낼 수 있다. 그러다 모어를 익힐 즈음엔 이 중에 10%도 안 남는다. 모어를 배운다는 건 90%의 소리를 내다 버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끔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본다. 아이 때 놀면서 냈던 ‘두구두구’ 헬리콥터 소리며, ‘부웅, 끼익’ 자동차 소리. 섬세하고 실감났다. 로켓은 ‘슈웅’ 지구 궤도를 지나 목성에 착륙했다. ‘야옹야옹’을 철자대로 발음한다면 반려묘 가족 자격 미달이다. 몸살에 시달릴 때 냈던 신음소리를 떠올려 보라. 글로는 ‘아아아’나 ‘으으음’ 정도일 텐데, 아픈 사람의 신음소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깊은 한숨을 쉬어보라. ‘후’나 ‘후유’로 온전히 담지 못한다. 더 놀라운 건 ‘스읍’이다. 보통 날숨으로 소리를 내는데, 이 소리는 들숨으로 낸다. 상대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멋쩍은 상황에서 내는 소리이다. 사전에도 없다.

낼 수 없을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순간, 그래서 언어 체계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바로 그 순간 말이 말다워지는 순간이다. 체계에서 배제된 요소가 실은 구겨진 채로 체계 안에 숨어 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1. ∥…………………………………………………………………… 목록

    Date2006.09.16 By바람의종 Views46035
    read more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Date2007.02.18 By바람의종 Views192573
    read more
  3.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Date2006.09.09 By風磬 Views207637
    read more
  4. 직거래하는 냄새, 은유 가라앉히기

    Date2022.08.06 By風文 Views1209
    Read More
  5. 고백하는 국가, 말하기의 순서

    Date2022.08.05 By風文 Views1049
    Read More
  6. 올해엔 저지른다, ‘죄송하지만’

    Date2022.08.04 By風文 Views965
    Read More
  7. 괄호, 소리 없는, 반격의 꿔바로우

    Date2022.08.03 By風文 Views1315
    Read More
  8. 비는 오는 게 맞나, 현타

    Date2022.08.02 By風文 Views1337
    Read More
  9. 적과의 동침, 어미 천국

    Date2022.07.31 By風文 Views1145
    Read More
  10. 노랗다와 달다, 없다

    Date2022.07.29 By風文 Views1262
    Read More
  11. 애정하다, 예쁜 말은 없다

    Date2022.07.28 By風文 Views1102
    Read More
  12. 공공언어의 주인, 언어학자는 빠져!

    Date2022.07.27 By風文 Views1174
    Read More
  13. 날아다니는 돼지, 한글날 몽상

    Date2022.07.26 By風文 Views1080
    Read More
  14. 말의 이중성, 하나 마나 한 말

    Date2022.07.25 By風文 Views1081
    Read More
  15. 어떻게 토론할까, 질문 안 할 책임

    Date2022.07.24 By風文 Views1203
    Read More
  16. 일본이 한글 통일?, 타인을 중심에

    Date2022.07.22 By風文 Views1189
    Read More
  17. 3인칭은 없다, 문자와 일본정신

    Date2022.07.21 By風文 Views1099
    Read More
  18. 돼지의 울음소리, 말 같지 않은 소리

    Date2022.07.20 By風文 Views1220
    Read More
  19. 말끝이 당신이다, 고급 말싸움법

    Date2022.07.19 By風文 Views1213
    Read More
  20. 1도 없다, 황교안의 거짓말?

    Date2022.07.17 By風文 Views1195
    Read More
  21. ‘짝퉁’ 시인 되기, ‘짝퉁’ 철학자 되기

    Date2022.07.16 By風文 Views1046
    Read More
  22. 형용모순, 언어의 퇴보

    Date2022.07.14 By風文 Views1283
    Read More
  23. 사람, 동물, 언어 / 언어와 인권

    Date2022.07.13 By風文 Views1094
    Read More
  24. 노동과 근로, 유행어와 신조어

    Date2022.07.12 By風文 Views1112
    Read More
  25. 교열의 힘, 말과 시대상

    Date2022.07.11 By風文 Views1170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