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1.10.10 12:58

어버이들

조회 수 78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버이들

말의 용도를 확장하여 한동안 쓰다 보면 정말로 그 뜻에 변화가 생긴다. ‘어르신’이라는 말은 ‘어른’이란 말의 존칭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노인’에 대한 존칭으로도 쓰이기 시작해서 요즘은 그리 어색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이제는 ‘이모’라는 말도 어머니의 자매만을 일컫지 않으며, ‘언니’라는 말도 더 이상 여성들의 손위 자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좋게 말해 의미가 풍부해진 것이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어버이’라는 말은 부모를 뜻하는 말이다. 부모라는 말보다 더 정감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단어도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다. 특히 북녘 사회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버이’가 아닌 ‘정치적 존경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원래 있던 ‘부모, 양친’이라는 뜻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한 단어에 두 가지 뜻이 깃든 것이다.

최근에 어버이라는 말이 남쪽에서도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획득했다. 매우 적극적인 보수적 사회운동에 열렬히 참여하는 어르신들의 단체명에서 비롯했는데, 이제는 거의 사회적 상징성을 지닌 단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남과 북에서 묘하게도 동일한 어휘가 전혀 다른 함축적인 의미를 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감 어리던 그 말의 의미가 웬일인지 매우 긴장되고 조심스럽고 거북하게만 느껴진다.

어버이라는 말은 어느새 남과 북에서 무언가 권위적이고 완고한 의미를 품은 어휘가 되어버렸다. 제대로 된 의회민주주의라면 정당하게 개념화된 어휘로 정치적 가치를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할 것이다. 비정치적인 어버이라는 말이 정치적인 함의를 얻게 되는 것은 아직 우리가 정치를 정직하고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탓이다. 남과 북의 관계가 더 나은 민주주의를 토대로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삶을 다정다감하게 만들던 어휘가 갑자기 대립을 상징하는 말로 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8799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5286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0231
3392 편견의 어휘 風文 2021.09.15 988
3391 여보세요? 風文 2023.12.22 990
3390 불교, 경계를 넘다, 동서남북 風文 2022.08.15 998
3389 1일1농 합시다, 말과 유학생 風文 2022.09.20 1007
3388 내색 風文 2023.11.24 1008
3387 올해엔 저지른다, ‘죄송하지만’ 風文 2022.08.04 1009
3386 왜 벌써 절망합니까 - 훼방만 말아 달라 風文 2022.05.23 1016
3385 부사, 문득 風文 2023.11.16 1021
3384 왜 벌써 절망합니까 - 8. 경영하지 않는 경영자들 관리자 2022.02.13 1023
3383 고양이 살해, 최순실의 옥중수기 風文 2022.08.18 1025
3382 언어와 인권 風文 2021.10.28 1028
3381 뒷담화 風文 2020.05.03 1030
3380 올바른 명칭 風文 2022.01.09 1038
3379 영어 절대평가 風文 2022.05.17 1039
3378 짧아져도 완벽해, “999 대 1” 風文 2022.08.27 1039
3377 댄싱 나인 시즌 스리 風文 2023.04.21 1039
3376 잃어버린 말 찾기, ‘영끌’과 ‘갈아넣다’ 風文 2022.08.30 1040
3375 안녕히, ‘~고 말했다’ 風文 2022.10.11 1041
3374 ‘맞다’와 ‘맞는다’, 이름 바꾸기 風文 2022.09.11 1045
3373 댕댕이, 코로나는 여성? 風文 2022.10.07 1051
3372 사과의 법칙, ‘5·18’이라는 말 風文 2022.08.16 1052
3371 외교관과 외국어, 백두산 전설 風文 2022.06.23 105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