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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라고

타협이 아닌 파국의 선택. 한 줌의 여지나 온기도 담지 않고 날리는 회심의 카운터펀치. 싸늘하다. 기병대처럼 옥죄어오는 상대의 논리를 이 말 한 방이면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다. ‘그래서’라는 접속사로 받아주는 척하다가 ‘어쩌라고?’라는 물음으로 대화는 끝. 상대방에게도 뾰족수가 없고 그저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려주는 신호.

논리를 비논리로 종료시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논리’는 인과관계의 문제다. 벌어진 사건의 원인을 어딘가에서 찾아 이어붙일 때 ‘논리’가 생긴다. 사람들이 찾는 원인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사회적 상식이나 억견, 편향, 수지타산을 반영한다.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갖는 힘은 이런 인과관계를 비슷비슷한 다른 인과관계로 대체하지 않고, 인과관계 자체를 싹둑 잘라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리는 급진성에서 나온다. 역사와 경험의 축적물이든, 고결한 사유에서 나온 것이든 ‘당신 논리는 똥’이라고 야유한다. 당신의 때 묻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 꺼지라.

처세술이나 정신 승리법이 아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미디어가 난무하고 진실보다는 진영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 찢어진 세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방편이다. 어른이 없고 세대는 단절되고 소문은 난무하되 공통의 감각과 인식은 옅어진 시대에 자신을 지키고 옹호하는 말. 부모든, 친구든, 역사든 무엇이든 의심하겠다는 주체 선언.

물론 이 말을 밥 먹듯이 하다간 전후좌우 가로세로를 분간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예리한 칼일수록 나를 벨 수도 있는 법.



‘사흘’ 사태

사과가 두 쪽 나듯 세상은 ‘사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뉘었다. 몰랐던 자들은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8월15일부터 17일까지 이어지는 휴일을 ‘사흘 연휴’라는 제목으로 뽑자 일군의 무리가 ‘3일 연휴인데 왜 사흘인가?’라는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흔한 ‘3일’ 대신 ‘사흘’이라는 말을 곳간에서 꺼내 쓰니 어휘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4일 쉰다’는 기대와 착각을 했다.

잘못 알고 나흘을 쉬었다면 몇 명은 직장을 잃거나 ‘창피하다’란 외마디와 함께 애인에게 버림받는 시련을 겪었을지 모른다. 구글 번역기도 ‘사흘’을 ‘four days’로 번역해 혼란을 가중시켰고, 몇 년 전에 ‘사흘’을 ‘4흘’로 쓰거나 ‘나흘’의 뜻으로 ‘4흘’이라고 쓴 기자의 이름이 알려졌다.

말은 어머니로부터 평등하게 배우지만 어휘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독서량의 영향을 받고 얼마나 반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3년 안에 ‘이레 만에’나 ‘여드레 동안’이란 말을 쓴 적이 있는가? 하물며 ‘아흐레’를? ‘섣달’이 몇 월이더라? 삼짇날은? 망각은 낱말의 세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말은 거저 배우는 것이지만 기억하고 자주 써야 자란다.

게다가 말소리와 뜻은 틈만 나면 딴 데로 튈 생각만 한다. 소리만 비슷하면 무작정 엉겨 붙는다. ‘엉뚱한’이란 뜻의 ‘애먼’이 비슷한 소리인 ‘엄한’에 속아 ‘엄한 사람 잡지 마’라고 잘못 쓰는 것도 같은 이치다. ‘디지털 포렌식’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엔 ‘방식’의 ‘식(式)’이 떠오른다. 소리는 의리가 없다. 바람둥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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