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01.31 18:06

말의 평가절하

조회 수 144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말의 평가절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그 대상을 높여서, 혹은 낮춰서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훈장’이라는 말은 좋은 뜻을 가졌었건만 세월이 지나면서 고루한 사람을 가리키는 듯한 의미가 강해졌다. ‘사장’이란 말도 기업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어느덧 평범한 세속적 호칭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그 말 자체의 가치 추락이 아니라 사회 변화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에서 비롯한다.

지난날 ‘양반’이란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희구하던 신분이었는가? 이제는 ‘이 양반, 저 양반’ 하고 좀 추켜 주는 듯하면서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일컫는 말이 되었다. 예전에는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도 ‘주부’로 가정살림과 육아에 전념하는 것을 그리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주부라는 말을 들으면 ‘무급 가사노동자’라는 정도의 의미가 먼저 떠오른다.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박사’가 드물었다. 어느 대학에서는 ‘교수’라고 부르면 대꾸도 안 하다가 ‘박사’라고 불러야 대답을 했다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였다. 요즘 ‘박사’는 대학원을 졸업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아직도 ‘명예박사’니 ‘명예교수’니 하는 말들은 그나마 인정받고 있으나 ‘명예퇴직’ 같은 말은 ‘명예’라는 말의 가치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명예퇴직당하다’라는 말이 구성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시장의 힘이 언어에 미치게 되니 여러 현상이 일어난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법칙이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이익이 생기는 새 어휘는 너도나도 사용하려 한다. 반면에 이익이 안 생기는 낡은 말은 주로 약자에게 사용하려 한다. 이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면 그들의 호칭과 지칭을 평가절하하는 데 원인을 제공하는 사회적인 불평등 구조를 먼저 해소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김하수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6376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2905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7852
3304 사저와 자택 風文 2022.01.30 1353
3303 국가 사전을 다시?(2,3) 주인장 2022.10.21 1353
3302 내일러 風文 2024.01.03 1353
3301 난민과 탈북자 風文 2021.10.28 1355
3300 영어 열등감, 몸에 닿는 단위 風文 2022.04.27 1355
3299 말의 바깥, 말의 아나키즘 風文 2022.08.28 1356
3298 3인칭은 없다, 문자와 일본정신 風文 2022.07.21 1358
3297 울면서 말하기 風文 2023.03.01 1360
3296 가짜와 인공 風文 2023.12.18 1361
3295 깨알 글씨, 할 말과 못할 말 風文 2022.06.22 1362
3294 발음의 변화, 망언과 대응 風文 2022.02.24 1365
3293 금새 / 금세 風文 2023.10.08 1365
3292 매뉴얼 / 동통 風文 2020.05.30 1366
3291 말하는 입 風文 2023.01.03 1366
3290 남과 북의 언어, 뉘앙스 차이 風文 2022.06.10 1367
3289 비계획적 방출, 주접 댓글 風文 2022.09.08 1369
3288 말의 이중성, 하나 마나 한 말 風文 2022.07.25 1371
3287 말과 절제, 방향과 방위 風文 2022.07.06 1373
3286 거짓말과 개소리, 혼잣말의 비밀 風文 2022.11.30 1374
3285 왕의 화병 風文 2023.11.09 1375
3284 주시경, 대칭적 소통 風文 2022.06.29 1376
3283 피동형을 즐기라 風文 2023.11.11 137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