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09 16:53

왕의 화병

조회 수 91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왕의 화병

나같이 온순하고 청순하며 버들강아지처럼 보드라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로 눈엔 쌍심지를 돋우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끝마다 쐐기벌레처럼 톡톡 쏘아붙이며 화내는 사람을 만나면 화덕 위에서 졸아붙고 있는 청국장처럼 몸이 쪼그라들고 속에선 매캐한 탄내마저 나는 듯하여 웬만하면 초장부터 안 만나는 쪽이 심신건강에 유익하렷다.

걸핏하면 화내는 사람은 주변 인심을 잃을지는 몰라도 자기감정을 시원 방탕하게 배설하니 무병장수할 공산이 큰 반면에, 당하는 사람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삭일 길 없어 몸에선 열이 나고 초점 잃은 눈으로 기운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가 이내 허공 위로 긴 한숨을 내뱉고는 답답한 가슴을 팡팡 치기도 하고 맥없이 드러누워 있다가 급작스럽게 벌떡 일어나기를 거듭하며 입이 깔깔하고 볼살이 빠지며 주름은 깊어지는데 예전엔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자리에 눕는 걸로 시위라도 했건만 이젠 그마저도 보기 어려워졌다.

기록상 최초의 화병 환자는 선조였는데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리는 자가 울화병에 시달렸다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겠으나 방계로 왕위에 올라 주변의 눈치를 봐야 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굴욕을 당했으며 전쟁 뒤엔 자신들이 왕을 잘 모셨다며 휘호를 내려달라는 조정 대신들의 상소를 접하니 어찌 화병을 앓지 않고 배길쏘냐. 선조 스스로 “나는 화병을 앓고 있는데 나에게 올리는 글을 읽으니 심기가 더욱 상하여 목구멍이 붓고 가래가 끓는 걸 내시들도 다 알고 있다”고 토로하였더라.

왕의 화병에 측은지심이 발동하다가 문득, 화를 내는 왕과 화병을 앓는 왕 중에 누구를 골라야 할지 궁금해진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8813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5410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0283
3388 매무시 風磬 2006.11.26 7851
3387 멍텅구리 風磬 2006.11.26 7054
3386 메밀국수(모밀국수) 風磬 2006.11.26 9090
3385 무꾸리 風磬 2006.11.26 7971
3384 미어지다 風磬 2006.11.26 8247
3383 미주알고주알 風磬 2006.11.26 7431
3382 바늘방석 風磬 2006.11.26 7476
3381 (밤)참 風磬 2006.11.30 6094
3380 벽창호 風磬 2006.11.30 5947
3379 볼멘소리 風磬 2006.12.20 6910
3378 부랴부랴 風磬 2006.12.20 5075
3377 부럼 風磬 2006.12.20 7060
3376 부리나케 風磬 2006.12.20 7376
3375 부지깽이 風磬 2006.12.20 6469
3374 부질없다 風磬 2006.12.20 10459
3373 불티나다 風磬 2006.12.23 7449
3372 불현듯이 風磬 2006.12.23 7901
3371 불호령 風磬 2006.12.23 8793
3370 비지땀 風磬 2006.12.23 7179
3369 빈대떡 風磬 2006.12.23 7654
3368 사근사근하다 風磬 2006.12.26 7921
3367 사또 風磬 2006.12.26 697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