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01.09 20:53

한자를 몰라도

조회 수 156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한자를 몰라도

한자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쉽게 믿게 되는 것이, 한자를 알면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까? ‘부모’나 ‘농촌’ 같은 말의 의미를 정말 父母, 農村이라는 한자를 통해서만 쉽게 알 수 있을까?

사실 그러한 어휘의 대부분은 소리만 들어도 금방 그 의미가 떠오르도록 우리의 인지 과정은 고도로 정비되어 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한자어는 ‘한자’라는 중간 단계가 필요 없이 의미를 직접 파악해 버린다. 좀 어려운 말의 경우에, 癡?(치매), 蒙昧(몽매)와 같은 말들은 일일이 한자를 따지느니 그냥 말소리만 외우고 개념을 익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한자는 원래의 의미를 잃고 어휘의 한 부분으로 변한 경우도 많다. 사람의 모양을 한 노리개를 인형(人形)이라 한다. 한자로 사람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곰이나 개의 모양으로 만든 것을 웅형(熊形)이나 견형(犬形)이라 하지 않고 그냥 곰 인형, 개 인형이라고 한다. 이미 인형이라는 말이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경우도 한자 ‘人形’은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저녁거리에 주전부리를 파는 ‘포장마차’를 보라. 말이 끄는 포장마차를 보았는가? 말이 끄는 수레로 비유하다 보니 한자는 있으나 마나 하게 되었다. 수많은 한자어의 처지가 이러하다. 닭의 가슴에 붙은 살을 계륵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닭가슴살은 영양식으로, 불필요한 군것을 가리켜 계륵이라 한다. 한자의 ‘어휘 의미’로 나타낼 수 없는 ‘감성적 의미’가 풍부해진 것이다.

한자를 몰라도, 또는 안 써도 이제는 언어생활에 큰 불편은 없게 되었다. 2천여 년 동안 인습화된 문자 생활이 겨우 100년 남짓 동안 혁신된 셈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375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0340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5342
3172 드라이브 스루 風文 2023.12.05 1444
3171 살인 진드기 風文 2020.05.02 1446
3170 “자식들, 꽃들아, 미안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부디 잘 가라” 風文 2022.12.02 1446
3169 성적이 수치스럽다고? 風文 2023.11.10 1446
3168 1도 없다, 황교안의 거짓말? 風文 2022.07.17 1449
3167 벌금 50위안 風文 2020.04.28 1450
3166 주권자의 외침 風文 2022.01.13 1450
3165 올가을 첫눈 / 김치 風文 2020.05.20 1455
3164 풀어쓰기, 오촌 아재 風文 2022.10.08 1457
3163 아카시아 1, 2 風文 2020.05.31 1458
3162 한소끔과 한 움큼 風文 2023.12.28 1459
3161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중소기업 콤플렉스 風文 2022.01.13 1461
3160 지식생산, 동의함 風文 2022.07.10 1461
3159 혼성어 風文 2022.05.18 1463
3158 보편적 호칭, 번역 정본 風文 2022.05.26 1470
3157 웰다잉 -> 품위사 風文 2023.09.02 1471
3156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IMF, 막고 품어라, 내 인감 좀 빌려주게 風文 2022.02.01 1474
3155 오염된 소통 風文 2022.01.12 1480
3154 만인의 ‘씨’(2) / 하퀴벌레, 하퀴벌레…바퀴벌레만도 못한 혐오를 곱씹으며 風文 2022.11.18 1480
3153 질문들, 정재환님께 답함 風文 2022.09.14 1481
3152 ‘웃기고 있네’와 ‘웃기고 자빠졌네’, ‘-도’와 나머지 風文 2022.12.06 1481
3151 지긋이/지그시 風文 2023.09.02 148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