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2.22 06:05

여보세요?

조회 수 95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여보세요?

 휴대전화는 예전엔 안 하던 고민을 하게 만든다. 유선전화는 누구 전화인지 알고 싶으면 무조건 받아야 했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액정화면에 ‘아는 사람’과 ‘모르는 번호’를 또렷이 구분해 보여준다. 모르는 번호면, 모르는 사람일 텐데…. 받을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대부분 보험 가입을 권하는 광고전화. 목화솜이불을 닮은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해 계속 들어주다 미안함만 쌓인다.

그렇긴 하지만,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가 광고전화라는 걸 언제 아는가? 생각보다 빠르다. 딱 첫마디! 두번째도 아닌 첫번째. 당신도 마찬가지일 테지. 광고전화는 “여보세요?”라는 말에 “반갑습니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 고객님 맞으신가요?”라고 말한다. 처음 통화하는 사람이 주고받으며 채워나가는 대화의 쌍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광고전화라는 걸 쉽게 들킨다.

우리는 전화를 받으면 “여보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십중팔구 “여보세요?”라고 대답한다. 첫마디가 뭐냐에 따라 내 답이 달라진다. 전화받는 사람이 “네, ○○부 홍길동입니다”라고 말하면 나도 “네, 저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자기 이름만 말했지만, 나도 내 이름을 밝히게 된다. 자기 이름을 밝히는 건 전화 건 사람도 이름을 밝혀달라는 메시지이다. 전화받는 사람이 “네, ○○부입니다”라고만 말하면, 나도 내가 누구인지 밝히고 싶지 않다.

비록 전화를 통해서지만, 우리는 대화를 하지 대본을 읽는 게 아니다. 말의 질서는 무척 섬세하고 교묘하다. 빈자리를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우리의 대화는 암묵적이면서도 명시적이다. 아는 형이 전화해 “저녁에 뭐 해?”라고 묻는다면 이유는 뻔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7758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4257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9180
3414 '미망인'이란 말 風文 2021.09.10 796
3413 고령화와 언어 風文 2021.10.13 798
3412 또 다른 이름 風文 2021.09.05 800
3411 언어 경찰 風文 2021.09.02 829
3410 딱 그 한마디 風文 2021.09.06 832
3409 재판받는 한글 風文 2021.10.14 844
3408 편한 마음으로 風文 2021.09.07 861
3407 언어공동체, 피장파장 風文 2022.10.09 865
3406 아이들의 말, 외로운 사자성어 風文 2022.09.17 866
3405 치욕의 언어 風文 2021.09.06 881
3404 맞춤법을 없애자 (3), 나만 빼고 風文 2022.09.10 889
3403 외국어 선택하기 風文 2022.05.17 921
3402 불교, 불꽃의 비유, 백신과 책읽기 風文 2022.09.18 924
3401 귀순과 의거 관리자 2022.05.20 928
3400 거짓말, 말, 아닌 글자 風文 2022.09.19 934
3399 편견의 어휘 風文 2021.09.15 938
3398 위드 코로나(2), '-다’와 책임성 風文 2022.10.06 939
3397 배뱅잇굿 風文 2020.05.01 943
3396 어떤 반성문 風文 2023.12.20 953
» 여보세요? 風文 2023.12.22 953
3394 대명사의 탈출 風文 2021.09.02 959
3393 막냇동생 風文 2023.04.20 96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