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22 09:31

몰래 요동치는 말

조회 수 107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몰래 요동치는 말

아무래도 나는 좀스럽고 쪼잔하다. 하는 공부도 장쾌하지 못하여 ‘단어’에 머물러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말에도 별 관심이 없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속에선 요동치는 말에 관심 가지는 정도. 이를테면, ‘연필을 깎다’와 ‘사과를 깎다’에 쓰인 ‘깎다’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 뜻이 한발짝 옆으로 옮아간 ‘물건값을 깎다’도 아니고, 그저 ‘연필’과 ‘사과’에 쓰인 ‘깎다’ 정도.

연필 깎는 칼과 사과 깎는 칼은 다르다. 연필 깎는 칼은 네모나고 손가락 길이 정도인 데다가 직사각형이다. 과일 깎는 칼은 끝이 뾰족하고 손을 폈을 때의 길이 정도이다. 연필은 바깥쪽으로 칼질하지만, 사과는 안쪽으로 해야 한다.

연필은 집게손가락 첫째 마디 위에 연필 끝을 올려놓고 반대편 손 엄지손가락으로 칼등을 밀어내며 깎는다. 사과는 손바닥으로 사과를 움켜쥐고 반대편 손은 사과 표면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넓게 벌렸다가 집게손가락에 닿아 있는 칼등을 엄지손가락이 있는 데까지 끌어당기면서 깎는다. 둘은 다르다고 해야겠군!

그래도 깎는 건 깎는 거니까 같다고? 좋다. 그러면 둘 다 같은 칼로, 같은 방향으로 깎는다고 치자. 그러면, 둘은 같은가? 행위에는 목적이나 결과가 있다. 연필을 깎으면 글을 쓰지만, 사과를 깎으면 먹는다. 두 동작(작동)의 목표와 결과는 다르다.

‘깎다’라는 말은 관념 속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물과 연결된 미세한 행동방식과 함께 몸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온 감각을 동원하여 지각하며 이해하며 행위한다. 말은 말 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외부 환경에 조응하는 몸의 감각과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좀스럽긴 하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8160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4571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9514
3392 막냇동생 風文 2023.04.20 969
3391 막장 발언, 연변의 인사말 風文 2022.05.25 975
3390 불교, 경계를 넘다, 동서남북 風文 2022.08.15 977
3389 1일1농 합시다, 말과 유학생 風文 2022.09.20 985
3388 올해엔 저지른다, ‘죄송하지만’ 風文 2022.08.04 998
3387 내색 風文 2023.11.24 998
3386 왜 벌써 절망합니까 - 훼방만 말아 달라 風文 2022.05.23 1002
3385 영어 절대평가 風文 2022.05.17 1004
3384 부사, 문득 風文 2023.11.16 1007
3383 고양이 살해, 최순실의 옥중수기 風文 2022.08.18 1009
3382 왜 벌써 절망합니까 - 8. 경영하지 않는 경영자들 관리자 2022.02.13 1014
3381 잃어버린 말 찾기, ‘영끌’과 ‘갈아넣다’ 風文 2022.08.30 1018
3380 ‘맞다’와 ‘맞는다’, 이름 바꾸기 風文 2022.09.11 1018
3379 언어와 인권 風文 2021.10.28 1020
3378 짧아져도 완벽해, “999 대 1” 風文 2022.08.27 1023
3377 안녕히, ‘~고 말했다’ 風文 2022.10.11 1023
3376 뒷담화 風文 2020.05.03 1024
3375 장녀, 외딸, 고명딸 風文 2023.12.21 1032
3374 댕댕이, 코로나는 여성? 風文 2022.10.07 1033
3373 올바른 명칭 風文 2022.01.09 1034
3372 댄싱 나인 시즌 스리 風文 2023.04.21 1038
3371 외교관과 외국어, 백두산 전설 風文 2022.06.23 103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