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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다’, 약속하는 말

인간만이 ‘약속’을 한다. 생각해 보라.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세상은 돌아가고 어떤 일이든 벌어진다. 그런데도 굳이 인간은 수시로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한다. 약속은 인간이 말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하게 될 행위를 단단하게 결속시키는 것이다. 자신과 세계를 맞물리게 함으로써 ‘말하는 동물’로서 인간의 본성에 다다른다.

문제는 약속을 무엇으로 보증하냐는 것이다. 약속은 그만큼 불이행의 가능성, 거짓 약속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모든 약속은 윤리적이며 정치적이다. “오늘부터 술을 끊겠어”라는 약속을 할라치면 “그 말을 어떻게 믿어?”라는 핀잔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걸다’라는 낱말이 등장한다. 화투를 치더라도 뭘 걸지 않으면 ‘놀이’이지 ‘노름’이 아니듯.

애초에 ‘걸다’는 튀어나온 곳에 어떤 물건을 달려 있게 하는 행동을 뜻한다. 벽에 못을 박아 놓으면 옷이든 모자든 쉽게 걸어 둘 수 있다. 안 보이는 곳에 숨기기보다는 드러내고 도드라지게 한다. 쓸모가 많은지 다양한 상황에 쓰인다. 전화를 걸고, 시동을 걸고, 말을 걸고, 시비를 걸고, 기대도 건다.

약속은 자신을 거는 것. 내뱉자마자 사라지는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스스로 자신의 목에 족쇄를 채우는 일.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더라도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을 ‘다 걸기’(올인) 하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명예를 걸고, 이름을 걸고, 직을 걸고 뭔가를 약속하는 장면은 얼마나 숭고하고 인간다운가.

부조리한 자들일수록 입만 살아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자리를 걸며 거짓 약속을 한다. 그들은 약속의 윤리성을 짓밟고, 세계를 타락시키며, (힘이 아닌) 말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한 인간 문명 자체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존버’와 신문

쌍스러워 보이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당신은 신문에 ‘존나’라는 단어를 써도 된다고 보는가? 알다시피 ‘존나’는 거친 욕을 살짝 달리 발음한 것이다. ‘졸라’, ‘조낸’으로 바꿔 쓰기도 한다. 양의 차이는 있지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즐겨 쓴다. 그래도 신문에 욕을 쓰는 건 무리겠지?

그렇다면 ‘존버’는 어떤가? ‘존나 버티기’의 준말인데, ‘끝까지 버티기’ 정도로 ‘예쁘게’ 의역한다. ‘존버 정신’이나 ‘존버 장인’이란 말로 확대되기도 했다. 생긴 걸 품평하는 ‘존잘(잘생겼다)’, ‘존예(예쁘다)’, ‘존멋(멋있다)’은 ‘존버’와 사촌지간이다.

말은 사전적인 뜻만을 전달하지 않는다. 모종의 감정이 들러붙는다. ‘존버’는 욕이기보다는 효율과 성과, 불합리, 과로를 강요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자구책 또는 삶의 지혜 같은 것이다(그게 ‘버티기’라니). 역설적이게도 긍정적인 느낌의 ‘끈기’나 ‘인내’와 비슷한 뜻이 되었다.

‘존나’라는 욕설이 섞인 ‘존버’는 이미 신문 여기저기에 쓰이고 있다. 아직 조심스러운지, 제한적이긴 하다. 외부 기명칼럼, 인터뷰, 문화면, 주식면 등에 주로 노출되는데, 대부분 따옴표를 쳐서 쓴다. 예컨대, “경력도 쌓고 퇴직금도 받으려면 ‘존버’해야죠” “(주식이) 언제 회복될지 감도 안 잡힌다. ‘존버는 승리한다’만 믿고 가야 하나” 식이다.

사람들은 일일이 어원을 따져가며 말을 쓰지 않는다. 당대의 상황을 생동감 넘치고 현장감 있게 담을 수만 있다면, 그 말이 하위문화나 비(B)급 언어이면 어떤가. 가끔 더 좋을 때도 있다. 입말과 글말의 문턱이 사라져 가는 조건에서 시대를 기록하는 기자들의 고민은 더 깊어지겠군. 존버할 건 존버하되, 유연하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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