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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헛걸음’ ‘헛소리’ 따위에 붙는 접두사 ‘헛-’은 한자 ‘빌 허(虛)’에서 왔다. 사전에선 ‘이유 없다’거나 ‘보람 없다’는 뜻이 덧붙는다고 새기고 있는데, ‘가짜, 잘못, 거짓’의 뉘앙스가 더 강하다. ‘나이를 헛먹다, 헛것을 보다, 헛똑똑이’ 같은 말이 그렇다. 매사를 투입 대비 산출로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행동강령이다. 적게 투입하고도 목표를 달성하면 박수를 받는다. ‘헛-’이 붙은 말들은 비능률, 비생산적인 상황을 지목한다. ‘헛-’이 빠지면 실속 있고 원하던 게 이뤄진 것이겠지. 힘을 썼으면 그에 맞는 성과를 얻어야 하리. ‘헛심(힘)’ 쓸 바엔 차라리 가만히 있으라. 눈에 보이는 성과(아웃풋)가 없는 일은 헛수고. 장사도 그렇고 배움도 그렇다. 돈 안 되는 일은 그만둬.

하지만 헛짓이 쓸모없지만은 않다. 헛기침은 민망함을 표시하거나 눈치주기의 용도로 요긴하다. 스산한 세상에서 헛웃음이라도 웃어야지. 상대의 턱에 주먹을 날리는 것보다 헛주먹질이 멀리 보면 낫다. 입덧이 심한 임신부의 헛구역질은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의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난다. 3할대 야구선수도 얼마나 많은 헛스윙을 했겠는가.

우리 대부분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며 산다. 헛물만 켜는 경우가 허다하다. 삶은 헛바퀴 돌듯 하고, 걸음을 헛디뎌 넘어진다. 그래도 지금 당장의 헛고생이 어떻게 굴절되어 나에게 쌓일지 모른다. 풍진세상에 살지만, 그래도 더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은 꼭 온다는 헛꿈이라도 꿔야 견디지. 그러니 헛되어 보이는 일도 잠자코 할 수밖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헛꽃도 예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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