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4.13 10:42

'김'의 예언

조회 수 157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의 예언

말은 시간과 닿아 있다. 경험과 기억이 쌓이기도 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그려 보게도 한다. 정신적 뼈와 살이 되는 말은 육체에 버금간다. 만져지는 말.

우리 딸은 2000년에 태어났다. 미인가 대안학교를 나온 그는 준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다. 매 순간 행복을 유예하지 않고, 사회가 미리 짜놓은 경쟁의 허들 경기에 불참하고 있다. 아비를 따라 합기도(아이키도) 수련을 하며 틈틈이 노래를 지어 부른다. 한동안 스파게티집 주방에서 종일 설거지 알바를 하더니 몇달 전부터는 채식요리(비건) 식당에 들어가서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요즘 그는 틈나는 대로 운다. ‘김’ 때문이다. 얇고 까무잡잡한 ‘김’. 올해 봄이나 여름부터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에 쏟아붓는다는 소식과 겹쳐 ‘김’이란 말을 뱉을 때마다, 김이 눈앞에 보일 때마다, 그의 머릿속엔 파국적 상황이 연상되나 보다. 다시 먹지 못할 김. 어디 김뿐이랴. 오염수는 늦어도 4~5년 뒤엔 제주 밤바다에 도달한다고 한다. 국경을 모르는 물고기들은 그 전에 피폭될 테고(이미 봄비는 내렸다).

일본 시민사회와 교류하고 있는 옆방 선생이 전하기를, 일본 지인들한테서 ‘안전한’ 한국산 다시마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온다고 한다. 일본의 어느 아침 밥상에서는 ‘다시마’를 앞에 두고 우는 이들이 있나 보다.

원전 마피아들은 오염수 방류의 파국적 미래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다. 아니, 무조건 ‘안전하다’고 떠든다. 생태에 대한 책임감을 찾을 수 없는 엘리트들보다 우리 딸의 감각이 더 믿음직스럽다. 늦지 않게 종말론적 체념의 감각을 익혀야겠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61744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8385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23211
3370 어떤 청탁, ‘공정’의 언어학 風文 2022.09.21 1356
3369 말과 서열, 세대차와 언어감각 風文 2022.06.21 1358
3368 꼬까울새 / 해독, 치유 風文 2020.05.25 1360
3367 언어적 도발, 겨레말큰사전 風文 2022.06.28 1362
3366 일고의 가치 風文 2022.01.07 1364
3365 이중피동의 쓸모 風文 2023.11.10 1364
3364 국물도 없다, 그림책 읽어 주자 風文 2022.08.22 1365
3363 언어의 혁신 風文 2021.10.14 1367
3362 올바른 명칭 風文 2022.01.09 1369
3361 권력의 용어 風文 2022.02.10 1371
3360 왜 벌써 절망합니까 - 8. 내일을 향해 모험하라 風文 2022.05.12 1375
3359 외교관과 외국어, 백두산 전설 風文 2022.06.23 1375
3358 매뉴얼 / 동통 風文 2020.05.30 1380
3357 몰래 요동치는 말 風文 2023.11.22 1380
3356 짧아져도 완벽해, “999 대 1” 風文 2022.08.27 1385
3355 노동과 근로, 유행어와 신조어 風文 2022.07.12 1386
3354 사람, 동물, 언어 / 언어와 인권 風文 2022.07.13 1389
3353 내연녀와 동거인 風文 2023.04.19 1389
3352 쓰봉 風文 2023.11.16 1392
3351 모호하다 / 금쪽이 風文 2023.10.11 1393
3350 연말용 상투어 風文 2022.01.25 1394
3349 고백하는 국가, 말하기의 순서 風文 2022.08.05 139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