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20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특성화고 3학년 소희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 인터넷 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방어(방해? 저지?)’하는 부서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는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인지 탐색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걸 숫자로 치환하는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숫자가 책임자다. 사회를 ‘돌아가게 하고’ 사람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는 숫자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가슴 두근거리지 않는다. 성과지표 합격률 취업률 가입률 지지율 인상률 연봉 같은 것들에 가슴이 뛴다.

영화의 매력은 제목에서 나온다. 피해자를 내세우고 ‘그다음 피해자는 누구냐?’며 다그치는 제목이라면 ‘소희 다음’ 정도면 될 텐데. 이상하다, ‘다음 소희’라니.

흔히 ‘다음’ 뒤에 오는 명사는 ‘다음 기회, 다음 정류장, 다음 사람, 다음 생’처럼 일반명사들이다. ‘다음 기회’는 지금과 다른 계기를 맞이할 듯하고, ‘다음 정류장’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겠지. ‘다음 피해자’라면 다른 인물이 다른 사건을 비극적으로 만날 것이다.

그런데 ‘다음’ 뒤에 ‘소희’라는 고유명사를 박아 넣었다. 이렇게 되니 빈틈이 생기지 않는다. 개별성이 사라졌다. 회로 변경의 가능성을 끊고 마개를 닫아버렸다. ‘당신 = 다음 소희’. ‘소희 다음’은 당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다음 소희’는 반드시 당신이라고 들린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소희다. 버둥거려봤자 소용없다. 다음도 소희, 그다음도 다시 소희. 무한 반복하고 무한 회귀하는 소희. 구제불능 사회의 절망감을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새로운 문법으로 표현하다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8483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4941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9899
3260 과잉 수정 風文 2022.05.23 1202
3259 정보와 담론, 덕담 風文 2022.06.15 1202
3258 남과 북의 언어, 뉘앙스 차이 風文 2022.06.10 1203
3257 ‘폭팔’과 ‘망말’ 風文 2024.01.04 1205
3256 풀어쓰기, 오촌 아재 風文 2022.10.08 1206
»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風文 2023.02.27 1206
3254 예민한 ‘분’ 風文 2023.05.29 1207
3253 적과의 동침, 어미 천국 風文 2022.07.31 1208
3252 까치발 風文 2023.11.20 1209
3251 우리와 외국인, 글자 즐기기 風文 2022.06.17 1210
3250 날씨와 인사 風文 2022.05.23 1212
3249 한글의 역설, 말을 고치려면 風文 2022.08.19 1215
3248 말하는 입 風文 2023.01.03 1215
3247 자막의 질주, 당선자 대 당선인 風文 2022.10.17 1216
3246 반동과 리액션 風文 2023.11.25 1217
3245 김 여사 風文 2023.05.31 1218
3244 ‘가오’와 ‘간지’ 風文 2023.11.20 1218
3243 혁신의 의미, 말과 폭력 風文 2022.06.20 1219
3242 공공언어의 주인, 언어학자는 빠져! 風文 2022.07.27 1219
3241 이단, 공교롭다 風文 2022.08.07 1219
3240 아니오 / 아니요 風文 2023.10.08 1219
3239 사라져 가는 한글 간판 風文 2024.01.06 122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