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2.05 14:28

상석

조회 수 124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상석

 신통하게도 같은 모양의 의자이지만 어디가 상석이고 어디가 말석인지 금세 안다. 문이나 통로에서 먼 쪽. 등을 기댈 수 있는 벽 쪽. 긴 직사각형 모양의 회의실에서 윗사람은 짧은 길이의 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평지인데도 상석(上席), 윗자리를 귀신같이 안다. 왜 그런가?

우리는 ‘힘’이나 ‘권력’을 ‘위-아래’라는 공간 문제로 이해한다. 힘이 있으면 위를 차지하고 힘이 없으면 아래에 찌그러진다. 이런 감각은 우연히 생긴 게 아니다. 숱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몸에 새겨진 것이다. 금메달을 딴 선수가 올라서는 시상대는 은메달, 동메달 선수보다 높다. 경복궁 근정전의 왕좌는 계단 위에 놓여 있다. 선생은 교단 위에 올라가 학생들을 굽어보며 가르친다. 지휘자가 오르는 지휘석도 연주자들보다 높다. 현실세계의 물리적 공간 배치는 사회적 권력과 지배력을 실질적으로 표현한다.

말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윗사람, 윗대가리, 상관, 상사’와 ‘아랫사람, 아랫것, 부하’(그러고 보니 ‘하청업체’도 있군). 위아래 구분은 동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명령을 내리고, 말 안 듣는 부하는 찍어 누른다. 아랫사람은 명령을 받들고, 맘에 안 드는 상사는 치받는다. ‘상명하복’은 관료사회의 철칙이다. 사진에서 상석은 맨 앞줄 가운데 자리이다. 결혼식에서 신랑신부가, 환갑잔치에서 어르신이 자리 잡는 바로 그곳. 쿠데타 성공 기념사진에서 살인마 전두환이 앉았던 그 자리.

‘상석’은 크고 작은 권력관계를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싶어 하는 인간 욕망의 그림자이다. 하지만 인간에겐 상석이 만드는 위계를 거역하는 힘도 있다. 상석에 앉지도, 중심에 서지도 않는 힘. 상석을 불살라 버리는 힘도 있다. (어딘가엔.)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3392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9995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4960
3348 어떤 반성문 風文 2023.12.20 1198
3347 사람, 동물, 언어 / 언어와 인권 風文 2022.07.13 1200
3346 군색한, 궁색한 風文 2023.11.21 1200
3345 경평 축구, 말과 동작 風文 2022.06.01 1205
3344 온실과 야생, 학교, 의미의 반사 風文 2022.09.01 1212
3343 내연녀와 동거인 風文 2023.04.19 1212
3342 24시 / 지지지난 風文 2020.05.16 1214
3341 모호하다 / 금쪽이 風文 2023.10.11 1215
3340 ‘내 부인’이 돼 달라고? 風文 2023.11.01 1218
3339 올림픽 담론, 분단의 어휘 風文 2022.05.31 1219
3338 인과와 편향, 같잖다 風文 2022.10.10 1219
3337 “이 와중에 참석해 주신 내외빈께” 風文 2023.12.30 1219
3336 노동과 근로, 유행어와 신조어 風文 2022.07.12 1223
3335 옹알이 風文 2021.09.03 1233
3334 왜 벌써 절망합니까 - 벤처대부는 나의 소망 風文 2022.05.26 1233
3333 말과 상거래 風文 2022.05.20 1234
3332 고백하는 국가, 말하기의 순서 風文 2022.08.05 1234
3331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이제 '본전생각' 좀 버립시다 風文 2022.02.06 1237
3330 ‘짝퉁’ 시인 되기, ‘짝퉁’ 철학자 되기 風文 2022.07.16 1237
3329 영어의 힘 風文 2022.05.12 1238
3328 시간에 쫓기다, 차별금지법과 말 風文 2022.09.05 1238
3327 연말용 상투어 風文 2022.01.25 123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