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16 09:52

부사, 문득

조회 수 132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부사, 문득

부사(副詞)는 이름부터 딸린 식구 같다. 뒷말을 꾸며주니 부차적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더부살이 신세. 같은 뜻인 ‘어찌씨’는 이 품사가 맡은 의미를 흐릿하게 담고 있다. 글을 쓸 때도 문제아 취급을 당한다. 모든(!) 글쓰기 책엔 부사를 쓰지 말라거나 남발하지 말라고 한다. 좋은 문장은 주어, 목적어, 서술어(동사)로만 되어 있다는 것. 부사는 글쓴이의 감정이 구질구질하게 묻어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지 못하면서도 마치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단다. (그러고 보니 이 칼럼의 분량을 맞출 때 가장 먼저 제거하는 것도 부사군.)

그래도 나는 부사가 좋다. 개중에 ‘문득’을 좋아한다. 비슷한 말로 ‘퍼뜩’이 있지만, 이 말은 ‘갑자기’보다는 ‘빨리’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퍼뜩 오그래이’). ‘문득’은 기억이 마음속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한다. 우리는 기억하는 걸 다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너무 깊이 있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수면 위로 불쑥 튀어 오른다. 그래서 ‘문득’은 ‘떠오른다’와 자주 쓰인다.

망각했던 걸 복원하는 것만으로도, ‘문득’은 성찰적인 단어다. 예측 가능한 일상과 달리, 우연히 갑자기 떠오른 것은 정신없이 사는 삶을 잠깐이나마 멈추게 한다. 기억나지 않게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떠오르면 자신이 겪어온 우여곡절이 생각난다. 작정하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이유도 모르게 솟아나는 게 있다니. 나에게 그런 일이, 그런 사람이 있었지. 돌이킬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우리를 두껍게 만들었다. 기대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된 인생, 허덕거리면서도 잘 살아내고 있다.

당신은 이 가을에 어떤 부사가 떠오르는가.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6285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9570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24274
3370 호래자식(후레자식) 바람의종 2007.04.27 15037
3369 호두까기 인형 바람의종 2010.05.29 11606
3368 호두과자 바람의종 2008.04.10 9717
3367 호남 바람의종 2007.09.29 9229
3366 호나우두(Ronaldo)와 호날두(Ronaldo) 바람의종 2010.02.28 12812
3365 호꼼마씸? file 바람의종 2010.03.07 8716
3364 호구 바람의종 2010.08.17 10499
3363 호구 바람의종 2007.09.26 11553
3362 호구 바람의종 2007.09.28 8579
3361 형제자매 바람의종 2008.01.26 11764
3360 형용모순, 언어의 퇴보 風文 2022.07.14 1801
3359 형극 바람의종 2007.09.23 12578
3358 바람의종 2007.09.22 9294
3357 혈혈단신, 이판사판 바람의종 2008.07.02 7906
3356 혈혈단신 바람의종 2010.07.17 12279
3355 혈혈단신 바람의종 2007.12.24 7751
3354 혈구군과 갑비고차 바람의종 2008.06.03 9049
3353 현수막, 횡단막 바람의종 2008.08.08 8503
3352 현수막, 펼침막 바람의종 2012.04.19 11799
3351 혁신의 의미, 말과 폭력 風文 2022.06.20 1719
3350 헷갈리는 받침 바람의종 2010.08.03 10857
3349 헷갈리는 맞춤법 風文 2024.01.09 246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