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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게 도둑질

날이 밝으면 어제와 다른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하지만 현실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제자리걸음.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숙명이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붙이는 이름인가 보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에는 지금까지 해온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현실인식이 담겨 있다. 자기 일에 대한 겸손함의 표현이자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원의 반지름은 여기까지! 배울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니건만, 하필 도둑질이라니. 말이란 참 짓궂다.

도둑질은 직업인가 버릇인가. 물건을 훔치되 잡히지 않으려면 섬세한 기술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점에서 전문성(?)을 인정해 줘야 할지도 모른다.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되는 주먹질, 싸움질, 이간질, 걸레질, 망치질과 사뭇 다르긴 하다.

‘도둑질’이란 말에서 풍기는 부정적 느낌을 잠시 접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가 배운 ‘도둑질’은 무엇인가? 살갗처럼 내 몸에 붙어 있어 떼어낼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나도 회사원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천성이 게을러서 정시 출근과 정해진 업무를 반복하는 게 싫어 그만두었더랬다. 그때 낮게 읊조렸었지. ‘내가 배운 도둑질은 기껏 선생질인가’.

자기 생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롭다. 다만, 과거에 사로잡혀 지레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숙명과 분수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경계 너머로 발 내딛는 용기도 필요하다. 도둑질밖에 배운 게 없는 사람들이 권력의 주변에 몰려든다는 소문을 듣고 드는 생각이다.



부정문의 논리

캬, 이 기발한 문장을 떠올리고 나서 얼마나 안도했을까. ‘오염수 방류의 계획상에 과학적 기술적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우리 정부가 오염수 방류를 찬성 또는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줄여서 ‘문제는 없지만, 찬성하는 건 아니다’ ‘문제가 없으니, 찬성한다’거나 ‘문제는 없지만, 반대한다’고 하지 않은 게 이 문장의 묘미.

부정문은 고차원적인 논리 게임이다. ‘ㄱ은 ㄴ이다’ 형식의 긍정문이 어떤 대상에 대한 적극적 판단과 해석을 표현한다면, ‘ㄱ은 ㄴ이 아니다’라는 부정문은 소극적이고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한다. ‘~가 아니다’, ‘~이지 않다’, ‘~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그것 아닌 모든 가능성을 허용한다. 세상사가 이분법적으로 확연히 나뉘지 않으므로. ‘너를 싫어해’ 대신 ‘너를 좋아하진 않아’라고 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너를 존경해’ 또는 ‘너를 사랑해’라는 ‘반전’을 꾀할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길수록 나는 안전해지고 책임은 옅어진다.

당신도 이런 적이 있을 거다. “옷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지만 사지 않을래.”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그 자리에서 사는 사람보다,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더 많다. 돈이 없어서, 비슷한 옷이 있어서, 먼저 사야 할 게 있어서. 판단의 근거는 무한대.

잔머리를 굴려 ‘찬성하지 않는다’는 고급 표현을 썼지만, 그 판단의 근거가 ‘찬성한다’는 뜻으로 읽히기 충분한 ‘과학과 기술의 문제’를 들이댄 게 잘못이겠지. 차라리 ‘일본이 오염수 방류를 밀어붙이고 있고 우리는 그걸 막을 힘도 의지도 없지만, 그렇다고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랬다면, 약소국의 설움을 함께 나누며 해양생태계의 궤멸을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말의 실패. 정치의 실패.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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