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3.06 06:34

“김”

조회 수 126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날 내 입에서도 더운 김이 솔솔 나온다. 모양이 일정치 않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이내 허공에서 사라진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이치를 집안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으로 이만한 게 없다.

‘김’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장 보는 김에 머리도 깎았다’처럼 ‘~하는 김에’라는 표현을 이루어 두 사건을 이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앞뒤 사건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게 아니다. 앞일을 발판 삼아 뒷일을 한다는 뜻이다. ‘장을 보고 머리를 깎았다’와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계기가 없다면 뒷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었겠지. 기왕 벌어진 일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용기를 낸다. ‘말 나온 김에 털고 가자.’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 변화를 위해선 뭐든 하고 있어야 하려나.

‘~하는 김에’가 숨겨둔 일을 자극한다는 게 흥미롭다. 잠깐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수증기를 보고 뭔가를 더 얹는 상황을 상상하다니. 순발력 넘치는 표현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9059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5655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0546
3344 올곧다 바람의종 2007.03.03 13910
3343 우레 바람의종 2007.03.03 8843
3342 우려먹다(울궈먹다) 바람의종 2007.03.03 13892
3341 웅숭깊다 바람의종 2007.03.03 16991
3340 을씨년스럽다 바람의종 2007.03.15 9825
3339 이녁 바람의종 2007.03.15 13885
3338 자그마치 바람의종 2007.03.16 11391
3337 자라목 바람의종 2007.03.16 7512
3336 잡동사니 바람의종 2007.03.22 9323
3335 장가들다 바람의종 2007.03.22 10248
3334 제비초리 바람의종 2007.03.23 13925
3333 적이 바람의종 2007.03.23 7251
3332 젬병 바람의종 2007.03.24 10531
3331 조바심하다 바람의종 2007.03.24 6580
3330 조카 바람의종 2007.03.26 11029
3329 줄잡아 바람의종 2007.03.26 11052
3328 지루하다 바람의종 2007.03.27 9488
3327 지름길 바람의종 2007.03.27 6484
3326 진저리 바람의종 2007.03.28 7952
3325 쫀쫀하다 바람의종 2007.03.28 10060
3324 천둥벌거숭이 바람의종 2007.03.29 8579
3323 칠칠하다 바람의종 2007.03.29 792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